
8회 목회자란?
조엘 오스틴 목사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유명한 목회자이다. 그래서 여러 언론매체에서는 그를 종종 인터뷰한다. 그때마다 그는 “나는 성경을 설명하거나 교리를 해명하는 일에 부름을 받지 않았다”고 말해왔다. 그는 ‘긍정의 힘’과 또 다른 그의 베스트셀러인 ‘잘 되는 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기를 “나는 성경의 세세한 면들을 설명하거나 난해한 신학적인 교리 혹은 논쟁을 들이 파는 것에는 소명이 없습니다. 내 은사는 격려하고 도전하며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라고 한결같이 이야기한다.
성경에 정통하지 않고 또는 성경을 풀어주는 것 없이 성도를 격려하고 도전하며 영감을 준다고 한 조엘 오스틴의 말은 자신 스스로가 “나는 성경으로 설교하지 않습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는 것을 독자들은 깨달아야 한다.
필자의 말이 억측으로 들리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즉, 크리스천에게 말씀은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목회자의 사명은 이 모든 것인 성경을 성도들에게 전해서 그들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살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주일학교 교사들도 공과시간에 초등학생들에게 성경을 알려주려고 성경을 공부한다. 하물며, 목회자가 성경의 세세한 면들을 설명하거나 난해한 신학적인 교리를 연구하는 것에 소명이 없다고 하는 것은 “나는 목회에는 소명이 없습니다.”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자신이 스스로 밝힌 정체성대로 브라이언 트레이시 같은 자기계발전문 강사 혹은 동기부여전문가로 남아야 한다. 목회에 소명이 없으면서 목사직을 유지하는 것은 교회의 비극이다.
이는 마치 프로축구선수가 프로야구경기장에서 투수의 공을 치겠다고 배터박스에 서 있는 것과 같다. 더구나, 조엘 오스틴 목사는 4번 타자다.
지금은 9회 말 투아웃 3-2로 지고 있는 순간. 조엘 오스틴 목사의 안타 하나면 역전할 수 있는 손에 땀을 지는 순간이다. 초구 스트라잌. 볼카운트는 어느새 투스트라잌 쓰리볼이 되었다. 관중들은 긴장해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있다. 투수는 마지막 공을 던졌고 그는 공을 쳐서 담장을 넘겼는데 아쉽게도 파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홈런이라고 우기며 다이아몬드를 돌고 있다. 심판이 아무리 아니라고, 파울이라고 선언해도 그는 막무가내다. 더 우스운 일은 관중들 역시 홈런이라며 그와 함께 뛸 듯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기가 끝난 후 조엘 오스틴 목사는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거봐요. 내가 맞았지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의 힘을 믿으니까. 축구선수인 나도 홈런을 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형통을 주시는 것을 다들 보셨지요.”
그가 목회하고 있는 현장은 위와 크게 틀리지 않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말씀을 풀어주셨다. 그때 제자들의 가슴이 뜨거웠다고 성경은 기록되어 있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예수그리스도 때문에 무척이나 괴로운 심령으로 어깨를 축 내리고 터벅터벅 걸어갔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선생님을 배신한 비겁자라는 죄책감과 3년 동안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삶의 비전이 살아진 공허함.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막막함 등 어느 것 하나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로 괴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말씀이 들어가자 그들의 괴로운 가슴이 뜨거워졌다. 희망이 생긴 것이다. 용기가 생긴 것이다. 비전이 생긴 것이다. 다시 일어서 달려갈 수 있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힘이다. 말씀의 위대함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동기부여도, 자기계발서도 따라올 수 없는 전무후무만 위대한 능력이 바로 말씀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반응하고 그 말씀을 들을 때 용기를 낼 수 있으며, 그 말씀으로 지배되는 삶일 때야 만이 참다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존재다.
조엘 오스틴 목사가 진정으로 레이크우드 교회 교인들과 자신의 책을 읽는 수많은 크리스천들을 사랑한다면 그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말씀을 늘 상고하며 연구해서 하나님의 깊은 것들을 깨달아 전해야 하지 않을까? 그가 언론과 책에서 늘 이야기하는 바대로 정말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전해주고 싶다면 말이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목회자이다.
성경은 유대인들을 버리는 것이 이방인들에게 도움이 되었거늘 그들의 일어섬이 얼마나 이방인들에게 또 하나님 나라에 유익이 되겠느냐고 가르치고 있다.
조엘 오스틴 목사의 일어섬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큰 유익이 될 것이다. 그의 눈에서 비늘이 벗어져 의에 대해, 죄에 대해, 심판에 대해 가르치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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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긍정의 본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깨닫기를 원하시는 내용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시는 것들이 제법 있다. 그 중 수위를 다투는 것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이다.
긍정과 형통에 대한 개념도 역시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우리는 성경에서 왕 솔로몬의 삶을 알고 또 돌에 맞아 순교한 집사 스데반의 삶도 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두 사람의 모델 중 하나를 택해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살 수 있으니 선택하라고 하면 필자를 포함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솔로몬의 삶을 택할 것이다.
왜냐면 솔로몬처럼 사는 것이 행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솔로몬처럼 살면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이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누리면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긍정과 형통의 개념일 것이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아스다롯을 섬겨 하나님의 노여움을 샀음에도 말이다.
반면, 스데반 집사는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증언하다 돌에 맞아 죽었다. 그가 죽어갈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열어 자신의 영광을 그에게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긍정과 형통은 이 땅을 버리고 천국을 살고자 했던 스데반 집사의 믿음에 손을 들어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형통과 사람의 형통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형통과 사람이 생각하는 형통이 이처럼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단 하나 천국에 대한 믿음의 차이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이 반드시 있으니 지금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이 천국을 사라! 고 애타는 심정으로 끊임없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이 없기 때문에 이 땅에서, 이 땅에서를 외치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혹자들은 이곳에서도 잘살고 천국에서도 잘 살면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반만...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 알고나 있는가?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로 와서 물었다. 어떻게 해야 제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쫓으라. 고 해답을 주셨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재물이 심히 많아서 고민하며 돌아갔다.
이 땅에서 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자기의 것으로 첫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둘째는 내 이웃을 위해 당신의 곳간을 열고, 당신의 마음을 열고, 당신의 열정을 열어서 그들을 돕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심령을 가난하게 유지하는 삶이 이 땅에서 잘 사는 삶이다.
예를 들어 긍정의 힘에서 나온 내용처럼 비즈니스 일등석으로 옮겨 타게 되었을 때나 또는 주차할 공간이 없었는데 자신의 차만 주차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주차할 곳이 없어 전전긍긍하는데 나만 주차한 것은 아닐까. 혹시 이 비행기 안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라고 나보다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잘 사는 삶인 것이다.
일전에 비판했었던 자녀의 대학합격을 위해 등에 자녀의 이름을 붙이고 기도하는 어머니들의 욕심도 같은 것이다. 남의 자식이야 어쨌든 오로지 내 자녀만 붙으면 그만이라는 지독히 이기적인 생각이 그들을 굿하는 자리로 내어 몬 것이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는 말이 있다. 오직 나만! 내 자녀만! 내 가족만! 내, 내, 내만 하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어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보는가!
그러나 항상 빈 마음으로 그 마음에 나보다는 하나님과 나보다는 이웃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욕심이 없는 이유는 욕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고 이미 더 큰 욕심, 천국이라는 더 큰 욕심에 이미 모든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이 땅에서 부하지 못해도 늘 즐거울 수 있다. 이 땅에서 주차할 공간이 없어 차를 수십 바퀴나 뱅글뱅글 돌면서도 입에서는 찬송이 흘러나오게 할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해도, 자녀의 죽음에서도 손양원 목사님처럼 10가지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형통이요. 이것이 바로 긍정이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다!
그 마음에 천국이 있음을 아는 확고한 믿음과 그 천국을 들어가고자 하는 강한 소망을 가지고 살 때 당신은 긍정의 힘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형통의 가르침이 한낱 공허한 외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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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회 긍정의 힘에서 사탄이 노리는 것!
마이클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는 ‘사탄이 장악한 도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도널드 그레이 반하우스 목사가 그려본 장면인데, 긍정의 힘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세상의 모습과 무척이나 닮아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반하우스의 말이다. “사탄이 필라델피아를 장악한다면,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도색물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깨끗해진 거리는 서로 웃음을 머금은 보행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저주 악담도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공손하게 말할 것이며,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는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의 세 가지 시험’에 대해 이런 강해를 들려줬다. “예수님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을 때 천사가 받들어주는 것을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떠받들고 절대로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에는 배가 아팠겠지만 예수가 십자가 지지 않았기에 더 큰 승리의 기쁨으로 함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위의 두 가지의 글을 통해 깨닫게 되는 사탄의 바람은 한 가지인 듯싶다. 어떻게 해서든,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들이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방임해서라도 사탄이 꿈꾸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우리의 관심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사탄은 어떻게 해서 우리의 관심을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일본인들의 비즈니스 전략에서 찾을 수 있지 싶다.
일본인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신발을 팔려고 고민을 하다 우선 신발의 편안함을 맛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판단해 일부 지역에 무료로 신발을 배포했었다. 원주민들은 호기심에 신발을 신기 시작했고 신발의 편안함에 익숙해진 그들은 이제는 신발 없이는 걸을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신발중독’에 빠지게 된다.
사탄의 전략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삶의 편안함이란 안락함을 주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난에서 멀어지게 한 후 우리를 ‘안락사’ 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행복, 건강, 부, 명예 등을 주는 것이라는 속삭임으로 끊임없이 다시 선악과를 먹으라고 유혹한다.
사탄은 당신이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입술로 시인했으니 이후로부터는 당신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한 번 구원받은 것이기에 구원이 완성됐다고 가르치며 이제는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지 말라고 권유한다.
율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며 행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조엘 오스틴 목사는 텔레비전에 나와서 인터뷰하며 몰몬교도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말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척도를 인간의 마음을 판단하시기 때문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의 말을 그대로 풀어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선한 마음 또는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마음을 기준으로 하신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에서 죄를 지어도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함을 아십니다.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께로 당신의 마음을 향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책에 핵심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의 죄를 단순한 실수 정도로 치부하고 쉽게 넘겨버린다. 이는 너무나 큰 잘못된 생각이요. 기독교 핵심의 왜곡이다.
인간의 죄가 단순히 실수 정도라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그 모진 고통을, 피를 흘려야 했겠는가! 오죽 죄가 미웠으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찢는 희생 제물이 되어서 인간을 구원했겠는가 말이다.
죄는 인간의 실수 정도가 아니다. 죄는 사탄의 본질이다. 죄가 사탄이고 사탄이 죄다. 따라서 죄를 범하는 것은 사탄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죄는 씻기지 않는다. 사탄과 하나가 된 것이 분리되지 않는다.
사탄은 멸망 받도록 예정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와 계속해 하나가 되어 있게 되면 그가 떨어지는 지옥에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죄의 삯이 사망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 감추고 싶어한다. 그 방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 중 현재 사탄이 가장 즐겨 쓰고 또 효과가 좋다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속성 중 ‘사랑의 하나님’ 이것 하나만을 뜯어내서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든 후 “이것이 하나님이다!”라고 강조하며 사랑의 하나님 마케팅전법으로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침투했고 그 결과물을 흐뭇하게 즐기고 있다. 물론 ‘긍정의 힘’도 그 여러 가지 결과물 중 하나다. 그것도 상당한 상위권에 포진되어 있는 결과물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에 하나님이시다. 일전에 필자는 하나님의 신비 중 하나는 균형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사랑과 공의 역시 하나님의 신비이다. 따라서 사랑과 공의도 너무나 놀랍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있는 새는 없다. 하나님도 사랑만 가지고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가 있기에 우리를 창조하신 권위자가 될 수 있으며 그분의 다스림에 고개를 숙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의 핵심은 십자가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도 십자가다. 우리는 십자가로 구원을 받고 또 십자가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된다.
공의의 하나님은 절대로 죄와 공존하실 수 없다. 그렇기에 죄에 대한 거침이 없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또 그렇게 가르치는 책은 신앙서적이 아니다. 또한, 죄에 대한 찔림을 듣지 않으려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양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내 양은 나의 음성을 듣는다.”하셨다. 예수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겠다 하셨다.
우리가 그의 양이라면 우리는 그분이 책망하시는 죄에 대해 늘 찔림을 느껴야 하고 그러므로 회개해야 한다. 왜냐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평생을 가도 우리는 절대로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의인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긍정의 힘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 심판이 없다. 그러므로 긍정의 힘에 나오는 하나님은 하나님일 수 없다. 아마도 긍정의 힘에서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가면을 쓴 사탄이겠지 싶다. 그 사탄은 오늘도 우리에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은 좋은 분이셔! 하나님은 좋은 분이셔! 하나님은 좋은 분이셔!” 그러나 깨어 있는 자들은 그 이면에서 울리는 또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죽어라! 서서히 죽어가라! 점점 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멀어져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 막 4: 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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