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0-11-2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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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땅밟기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질 때, 트위터에 한 청년이 올린 글을 올렸습니다. 그는 이 사건에 대해 고성제 목사(평촌평성교회)가 설교한 내용이 있는데, 의미하는 바가 많다는 글이었습니다. 평촌평성교회 홈페이지(www.pcps.or.kr) 인터넷방송에는 219, 220번으로 두 설교 영상이 올라와 있는데. 고성제 목사는 이 사건이 발생하고 바로 “땅 밟기, 성경이 그렇게 말하나요?”(10월 31일)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고, 다음 주에도 “확신, 열정 그리고 존중, 그 사이의 긴장”(11월 7일)이란 설교를 했다고합니다.
이 두 편의 설교에서 고성제 목사가 지적하는 것은 “봉은사 땅 밟기와 같은 행동들은 성경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을 잘못 읽거나, 해석을 잘못한 결과”라는 내용입니다. 아래의 고목사님의 설교내용을 요약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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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17장16-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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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 땅밟기, 영적 전쟁 아닌가요? 확신, 열정 & 존중, 그 사이의 긴장!!
“봉은사 땅밟기”라는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세인들의 지탄을 받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을 보면서 당혹해 하면서도 정말 그들의 행동이 믿음의 행동인지, 비난받아야 할 행동인지 헷갈리고 있다. 그렇게 헷갈리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 성경에는 분명히 발로 밟는 땅을 네게 준다는 약속이 있는 것 같다. * 여리고성 사건은 믿음으로 땅을 밟으면 그 앞에 있는 이방인 혹은 모든 장애물들이 다 무너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수많은 가나안 정복 전쟁과 밤 사이 바알제단을 헐고 이세라 신상을 찍어 버린 기드온의 이야기는 땅밟기나 단군상 훼손을 지지하는 것 같이 보인다. * 그리고 주님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하였고 *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면서 신앙생활을 영적 전쟁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사건으로 당혹해 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을 믿음의 행동으로 보아야 할지 비난받을 행동으로 보아야 할지 헷갈려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번 일을 계기로 이 일에 대한 성경적 입장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 무엇이 문제인가? 첫째, 이번 일의 배후에는 성경을 잘못 읽어서 발생한 심각한 오해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에는(예: 수1장) 발로 밟는 땅을 네게 준다는 약속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발로 밟으면 어떤 방식으로든 승리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은 발로 밟으면 네게 준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네게 준 땅이니 이제 가서 차지하라는 말이다. 그것은 땅을 밟으면 네 것이 된다는 것을 약속하는 말씀이 아니라 이미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심과 그 약속이 성취되는 일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임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둘째, 어떤 경우에는 읽기는 바로 읽었으나 해석이 잘못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여리고 성 싸움을 성 주위를 밟기만 하면 이방인의 성이 무너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하지만 그러나 그 싸움은 앞으로 있을 가나안 정복전쟁의 근본성격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앞장서는 싸움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성을 도는 것이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다. 실제 조금만 문맥을 넓혀서 여호수아서 전체에서만 보아도 그런 일은 그 때 한번만 있었을 뿐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셋째, 어떤 사람들은 가나안 정복전쟁을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이 싸움이 근본적으로 이방인을 멸하기 위한 싸움이 아님을 놓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이집트나 바벨론에 대한 전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엄격하게 제한된 지경 안에서의 싸움, 곧 이스라엘에게 이미 주어진 땅 안에서 우상을 제거하기 위한 싸움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처절하게 싸우고 진멸할 것을 명령하지만 결단코 지경 외에 이웃나라를 그런 방식으로 정복하라는 명령을 주신 일이 없다. 가나안에서의 정복전쟁은 여호와 신앙과 그 말씀 위에 남다른 사회를 세우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전쟁은 오늘날 교회와 우리 자신의 거룩과 성결을 위한 싸움으로 <우선>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는 기드온이 바알과 아세라의 제단을 부숴버린 것에 감동받지만 그러나 그것도 - 우리의 상황에서는 - “자기 집안의 우상”을 제거한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성경이 심지어 패망 후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조차도 이방 신상을 무너뜨리라는 이야기를 조금도 하지 않았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방 신상들이 즐비한 가운데 살았던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보라. 그들의 관심과 열심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재건과 영적인 부흥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영은 그들을 그런 방향으로 감동하셨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되는 싸움이요, 성도가 성도 되는 싸움이다. 왜인가? 교회의 세상에 대한 승리와 정복은 교회가 막대한 물질이나 세속적인 권력을 가질 때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다울 때 이루어지 때문이다.
◉ 이 관점은 신구약을 관통하는 관점인가?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든지 우리의 입장이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지지받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 사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볼 때 가장 온전히 드러난다.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주님은 어떤 경우에도 이방인의 신전을 저주하면서 밟은 일이 없다. 주님은 당시 유대인을 압제하고 있던 로마에 대해서도 저주하지 않으셨다. 주님께서 적개심을 드러낸 상대가 있다면 오히려 위선적인 교회 지도자들이었다. 주님이 뒤집어엎은 것이 있다면 예루살렘 성전이지 이방신전이 아니다. 왜 그랬을까? 주님이 보시기에 쇄신되어야 할 것은 교회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교회공동체가 새로워질 때 그것으로 세상에 복음의 영향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역점을 두신 것은 이방신전을 저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일 곧 세상의 방식이나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며 그 분이 말씀하시는 방식과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만드는데 집중하셨다.
아테네에서의 바울을 보라고? 이렇게 이야기 하면 사도행전 17장에 나오는 아테네에서의 바울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16절은 바울이 아테네에 가득한 우상을 보면서 격분했다고 한다. 그렇다! 바울은 그들의 우상을 보면서 격분을 느꼈다. 그러나 이 분노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이 엉뚱한데 돌려지고 있는 데 대한 분한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야 할 마음이다. 어찌 보면 봉은사 땅 밟기를 했던 이들에게는 이런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있었다면 그 점은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분노를 어떻게 풀어가는가 이다! 바울은 이 격한 마음을 가지고 어찌하는가? 그는 조용히 신전을 빠져나와 유대인의 회당이나 시장으로 나간다. 거기서 바울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서 변론한다. 17절에서 말하는 “변론한다”는 말은 “논리를 가지고 상대방의 신앙와 입장을 파헤치고, 논리를 가지고 자기의 신앙을 설명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영어 성경은 “Reasoning”이라고 번역하는데, 이것은 “어떤 것에 대해 옳고 그름에 대해 그 이유를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따져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막무가내로 불신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준비해서 그들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때를 얻든, 못 얻든 말씀을 전파하라”고 했던 열정의 사람 바울의 전도방식이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라는 그의 말을 막무가내와 같은 뜻으로 오해하는 것을 종종 본다.
또 바울은 그렇게 변론하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 사람들을 만나 전문적인 포럼의 장소인 아레오바고로 옮겨 좀 더 깊이 있는 변론을 하게 된다. 여기서도 바울은 어떻게 하는가? 절대 막무가내로 “너희가 믿는 신들은 다 헛것이야!!!”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보니 당신들은 참 종교적인 사람들입니다. 내가 당신들이 섬기는 것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거기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있더군요.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알지 못하고 섬기는 신, 여러분이 진실로 알기를 원하는 그 신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마음 속에는 하나님을 위한 분한 마음으로 가득했지만, 그러나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예의와 존중의 태도로 표현했다. 왜 그랬을까?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는 상대방의 마음을 닫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런 소통도 불가능한 것이다. 또 하나, 바울은 그 많은 신전과 제단을 세우고도 모자라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제단까지 세운 그들의 태도를 비록 가련하지만 ‘간절히 신을 찾는 몸짓’으로 보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며 공격하기보다 접촉점을 찾아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것이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하면서 투구, 흉배, 방패, 검 등 는 전투적 용어로 영적인 싸움을 종용했던 바울의 실제적인 태도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사역을 계시록과 관련해 보면서 마무리 해보자 주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역을 하셨는가? 이방 땅이나 사마리아 지역에 가서 신상을 저주하면서 빙빙 돌았던가? 아니다. 오히려 주님은 수가성 여인을 찾아가 깊이 준비된 한마디 한마디로 그녀의 실상을 발견하게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생수되신 주님 자신임을 알게 하셨다. 우리는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영적인 전쟁임을 기억해야 한다.
흔히 사람들은 영적 전쟁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로만 생각한다. 많은 경우 코로 적개심을 뿜어내며 “너 더러운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 하는 것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을 보라. 주님께서는 늘 그렇게 사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대개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너무나 부드럽고 온유한 방식으로 주변을 돌보고 치유하며 살아가셨다. 그런데 그것이 실상은 치열한 전쟁이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마리아 지역으로까지 넓히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요한계시록12장을 보면 “용과 더불어 싸우는 하늘의 큰 전쟁”이 나온다. 그것은 하늘의 큰 싸움이지만 그러나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말한다. 그것이 큰 전쟁인 것은 그것이 이미 존재했던 사람부터 미래에 존재할 전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쟁이 주님의 지상의 삶을 통해 나타날 때는 어떤 방식으로 나타났는가? 적개심을 가지고 땅을 밟는 방식으로 나타났는가? 남의 종교적 상징을 훼손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는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쟁모드로 나타나기보다 오히려 너무나 온유하고 부드러운 모드로 일관된 삶으로 나타났다. 그분은 너무나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사역하셨고, 마침내 붙잡히고 조롱당하고 죽임 당하셨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실상은 엄청나게 큰 싸움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영적 싸움도 그와 같다. 우리에게도 영적 싸움은 종교간의 갈등이나, 단지 “명하노니 물러가라!”는 방식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대신 우리의 싸움은 예수님 같은 삶을 사는 (혹은 살기 위한)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것은 종교간의 갈등이나 “명하노니 물러가라!”는 방식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의 빛과 소금의 방식, 그리스도의 향기의 방식, 우리의 삶 속에서 읽히는 편지의 방식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기억하였으면 좋겠다. 우리의 적개심은 우리 자신과 공동체 안에 있는 죄와 오염과 위선에 대해 더욱 강하게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는 “희생과 변화된 인격을 통한 향기와 울림”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믿는 진리에 대해 분명한 내적 확신과 열정을 가지되 다른 한편 존중의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정복하는 일은, 한편 교회 안에서는 교회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통해, 다른 한편 세상을 향해서는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함께 가주라는 주님을 따르는 섬김의 삶을 통해 선포되고 달성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구약시대에 가나안 경내에 대해서는 철저한 정복을 명하면서도, 이웃나라에 대한 정복전쟁은 결코 명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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