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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1-04-21 10:24
긍정의 힘 -- 뒤집어보기 (1번째)
 글쓴이 : 정영대
조회 : 1,309   추천 : 0  

누구든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긍정의 힘"  다들 알고 계시죠..

울 내힘이도 읽고 있는데..  이책에관해서 비판하는 내용이 여러곳에서 들리기에

도대체 어떤내용이기에 그런걸까 찾아보다 한 기자가 연제해서 쓴내용을 올려봅니다.

내용이 많습니다. 천천히 읽어보시고 바른 신앙으로의 진보가 있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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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의 앞장에는 한국기독교의 유명인사들의 추천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대형교회 목사는 물론 한국기독교를 선도하는 이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긍정의 힘의 위대함을 추천사로 쓰고 있다. 필자도 그들의 추천사로 인해 책을 사서 보게 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러나 책을 모두 읽어가면서 계속해 오싹한 기분이 들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유는이것이 한국기독교의 현주소구나.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땅에서의 삶과 성공에 주목하는 현실이 이미 한국기독교문화에 뿌리 깊게 박혀 있구나. 그리고 이를 질타하고 권고해서 길을 돌려야 하는 한국교회의 리더들 역시 이러한 세속의 문화와 함께 하고 있구나!”라는 안타까움 때문이었다.

물론 일부분만 보고 나름의 잣대로 판단한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사람의 사상이 담기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글이다. 그리고 글은 짧을수록 개인의 사상을 응축하는 힘이 있다. 마치 시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아무리 우린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지라도 짧게라도 나타난 추천의 글에는 분명 하나님 나라보다는 세속주의 성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음을 아쉽지만 부인할 수 없다
.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면 사람의 귀는 한쪽이 들리면 한쪽은 들리지 않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이 땅에서 잘 되고 영광스럽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가장 큰 바람이라고 사고하는 순간, 다른 쪽에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순교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죽여가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가야 하는 더 큰 사명과 영광에 대해서는 더 이상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

필자가 책을 해석하는 능력이 윗분들보다 떨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필자가 해석하는 성경은 분명히 이 땅에서의 성공추구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죽이고 낮추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 즉,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 타인을 더욱 이롭게 하는 삶을 하나님은 더 좋아하시고 영광스럽게 생각하신다고 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앞의 연재 글에도 주장했듯이
긍정의 힘에는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다. 이를 그 수많은 기독교 리더들이 보면서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번영신학(긍정의 힘은 미국을 휩쓸고 있는 번영신학의 한 조류이다. 이는 추후에 번영신학을 고발한다. 편에서 자세히 기술하겠다. - 역자 주)이 한국기독교를 장악했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기독교는 인생의 성공을 추구하며 행복을 얻으라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성공을 버려가며 하나님의 백성을 이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종교이다. 왜냐면 우리가 살 곳은 이 땅이 아니라 저 천국이고 이곳은 그저 잠시 왔다 안개처럼 사라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너희는 천국을 사모하라고 간곡하게 설파하셨던 것이다
.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달콤한 성공의 말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그때는 주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돌을 맞는 시대가 될 것이다. 그것이 사는 길임에도 말이다. 달콤한 것을 계속 먹으면 이는 반드시 썩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아버지로서 우리의 원하는 것을 반드시 들어주시며 우릴 형통하게 하시는 분이시다는 반쪽짜리의 사탕발림 복음만을 계속해서 들으면 우리의 영혼은 반드시 썩게 된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다
.

그리고 그 죄의 값은 강단에서 위와 같은 말씀을 전한 목회자들과 기독교리더들, 기독지식인들 그리고긍정의 힘같은 썩은 메시지를 양산하는 못된 책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물론, 듣기에 즐거운 설교만을 찾는 기독교인들에게도...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라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 마태복음 2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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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 53페이지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저자는 주차할 공간이 없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차할 공간이 생겼다며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항상 나를 따라다닌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가 이처럼 작은 곳에서조차도 항상 형통으로 이끈다는 의미로 이 글을 썼을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위험하다. 이 글의 논리대로라면 형통은 곧 하나님의 은혜여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꼭 형통에만 있지 않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주위에는 예수를 열심히 충성되도록 섬기면서도 형통하지 못한 이들이 있다. 아주 많다. 그런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것인가
?

실례로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옥에 갇혔다. 그럼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것인가. 분명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바울과 실라는 주를 위해 충성했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들에게 좋은 대접을 받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은혜 받은 자의 논리다.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를 한 번 보라.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다. 매를 맞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은 찬송하고 기도했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본질이다
.

하나님이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의 본질은 단순히 형통에 있지 않다고 한국교회는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오히려 형통하지 못해도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

필자는 일전에 다닌 회사에서 급여가 다섯 달째 나오지 않아 한 때 매우 궁핍한 삶을 산 적이 있다. 심지어 아침과 점심 두 끼를 굶어야 했을 정도로 궁핍했었다. 그러나 자랑이 아니라 그때 필자는 하나님께하나님 지금이야말로 제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을 보여드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군요. 하나님 앞으로도 더 굶으라면 굶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드린 적이 있다
.

물론 그 기도가 응답되어서 가끔 한 끼씩 더 굶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때도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필자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었던 것이다
.

그러나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은혜의 개념은 형통이다. 절대로 형통은 은혜가 아니다.(물론 가장 정확한 표현은 형통만이 은혜는 아니다 임) 가난도 저주가 아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도 은혜를 못 받은 것이 아니다. 일이 잘되든 안 되든, 부유하든 가난하든, 형통하든 그렇지 않든, 결혼하든 자식이 죽든, 인생사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희로애락 모든 일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반드시 있다고 고백하고 믿는다면 이는 모두 은혜 받은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

긍정의 힘의 저자처럼 작은 일에도 형통해야 은혜가 그 사람을 따라다닌다고 말하지 말고 형통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우리는 왜 그런지 모르지만 분명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고 봐야 올바른 은혜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긍정의 힘의 저자는 57페이지에 이어서도 계속해 은혜를 설명하면서 비행기 이등석에 앉아 있었는데 일등석으로 옮기게 된 예 등을 들며더 큰 은혜를 사모할수록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부어 주신다.”고 설명했다. 저자가 주장하는 은혜의 논리는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이 더 크게 형통하게 된다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했으면 하는 더 큰 은혜는 성령의 은혜이지 결코 형통의 은혜가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끝으로 저자는 은혜를 설명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시련 속에서 찾아온다고 했다. 찾아온다는 표현은 아직 은혜가 오지 않았다는 의미다. 즉 시련이 지나면 그 후 은혜가 찾아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시련이 곧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면 사람은 시련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힘든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시련을 주신다는 뜻이다. 그 시련으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당신이 영원히 살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련은 그 자체가 곧 은혜이다. 어쩌면 형통보다 더 간절하게 소망해야 하는 것이하나님 내게 시련을 주셔서 늘 저의 부족함을 깨달아 주 밖에는 나의 구원자가 없음을 늘 알게 하옵소서라는 쉽지 않은 간구이지 않을까
?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열심히 믿다가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해역시 신은 없어. 있어도 나는 사랑하지 않아라며 그리스도를 떠나가는지 아는가! 왜인가? 그가당신이 고난 중에 있고 삶의 형통이 없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버린 것이 아니다는 참된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늘 교회 가면 듣는 말씀들은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십니다.”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여러분을 형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등등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는 공허한 외침뿐이다
.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주셨다. “너 내가 간 길을 따라올래? 그 길은 쉬운 길이 아닌데. 그 길은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걸어와야 하는 좁은 길이란다. 그래도 너 나 따라올래? 그 길을 걷다 보면 너는 세상에서 만물의 찌끼같이 될 수도 있단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린 바 되어 왕따가 될 수도 있단다. 그래도... 그래도 너 나 따라올래?”

이 길이 크리스천의 길이다. 어떻게 이 거룩한 길에 형통이란 값싼 은혜로 피묻은 십자가에 똥칠을 한단 말인가!

필자라고 형통이 싫겠는가? 필자라고 벤츠가 싫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형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양립할 수 없다. 세상에서 형통을 강조하고 그것에 추구하는 것은 세상과 하나님이란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은 절대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기가 막힌 균형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균형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형통도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균형을 잃어 하나님의 은혜 = 형통이 되면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균형이 깨어진다. 깨어진 틈에는 반드시 마귀가 침입해 우리의 영혼을 도적질해가게 되어 있다
.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엽적인 내용에서 탈피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 그리고 겸해 형통에 대한 메시지가 강단에서 전해져야 할 때이다.

 

 

가짜 형통, 진짜 형통


몇 년 전 TV에서 수능시험을 앞둔 자녀들을 둔 어머니들이 등에 자식의 이름을 붙이고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하는 것이 방영된 적이 있다. 독자들 중에도 보신 분이 여럿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이 빨개졌었다. 잠시지만 교만하게도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부끄럽다는 생각도 해봤다. 자녀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저러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관용돼서는 안 되겠다 싶다. 왜냐면, 그들의 행태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당에게 가서 굿하는 것이지.

이들이 자녀의 이름을 등에 붙이고 기도하는 그 중심에는 형통에 대한 그릇된 성경관이 있기 때문이며 그네들의 욕심 때문이고 이는 그들의 담임목회자의 그릇된 가르침 때문이다. 그 교회의 담임목회자를 포함해 등에 이름을 붙이고 기도하는 그들에게 형통의 개념은 어떤 것인가? 자녀가 좋은 대학에 붙기를 희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등학생을 밤 11시까지 과외를 받게 해 축 쳐진 어깨로 다니도록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는 거룩한 욕심 때문인가. 아님 이 땅에서 잘 살고자 하는 부끄러운 욕심 때문인가
!

그들에게 하나님이란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존재는 자녀들의 성공을 이루어주는 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이것은 굿하는 것이지. 절대 믿음 생활이 아니다.

잘못된 형통의 개념은 이처럼 왜곡된 신앙의 행태를 가져온다.

형통에는 가짜 형통이 있고 진짜 형통이 있다. 위의 것들은 모두 가짜 형통을 심어주는 내용들이다. 형통은 시편 1편에 잘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을 늘 생각하는 삶이 진짜 형통이라고 말하고 있지, 이 땅에 것에 착념하는 것을 형통이라고 말하지 않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혹자는 이 땅에서의 부함과 건강을 추구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 질문에 필자는 이 땅에서 부하고자 하는 마음과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비성경적이거나 하나님이 원치 않으신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무슨 헷갈리는 소리냐는 반문이 있겠다.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니 특히 주의해서 읽어주기 바란다
.

성경에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건강이 하나님께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예수님께서 일부러 채찍에 맞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온몸의 피를 다 쏟으시도록 채찍에 맞으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셨다
.

그리고 부에 대한 내용도 나오는데. 그가 가난하게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부요하게 해주시려고 라고 기록된 부분이 있다. 여기에는 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성경의 여러 정황들과 비교해석 해 봤을 때 여기서 말하는 부요하게 함은 물질의 부요를 이야기함도 포함되어 있다
.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구속사 중에는 인간의 구원이 중심이지만 그 외 외적인 것들 즉, 우리가 이 땅에서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히 살 길을 열어놓으셨다는 뜻이다
.

그런데 필자는 앞에서 이 땅에 것에 착념치 말라고 했다. 긍정의 힘이 이 땅에 것을 이루는 것에 집중된 책이라서 위험하다고 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며 짜증을 내는 독자들도 있겠지 싶다
.

길게 끌지 않고 필자가 하고자 하는 말을 해 드리겠다. 바로 가짜 형통과 진짜 형통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결론을 말씀드리고 그 이유를 설명해 드리겠다.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가 형통의 논란의 마침표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의 끝 부분에서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 하셨다.

 

그 말인즉슨 우리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할 필요성도 아시고, 내일 양식을 사 먹을 돈이 필요한 것도 아시고, 집 나간 남편이 돌아와야 하는 것도 아시고, 암으로 날마다 고통의 신음을 흘리는 것도 아신다는 뜻이다. 인간들의 모든 희로애락을 친히 아시기에 고쳐 주시고 해결해주시며 싸매주신다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고치고 해결해주시지도 않으실 거면서 일부러내가 네 문제 알고 있어.”라고 말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전에, 다시 말해 당신에게 하나님께서 형통의 은혜를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먼저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먼저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것 말이다. 이것은 참된 형통으로 가는 관문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자신의 나라를 구하라고 했다고 하나님을 이기주의자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이는 성경에 무척이나 무식한 사람의 전형적인 기독교 깎아내리기이다. 성경의 전체를 보라.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인간들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거나 기대하거나 하시지 않으셨다. 간혹 인간에게 너무나 잔인하다 싶을 정도의 사건을 성경에 기록해놓으셨지만, 시간이 흘러서 보면 그것이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오랜 후의 역사가 증명하기도 한다.

위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겠다는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마음은그래야 너희가 진짜 형통을 얻을 수 있어이다
.

하나님은 인간을 세상보다 귀하게 만드셨다고 하셨다. 혹시 여러분 중에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었는데 막상 이루고 나니 허전함을 느끼신 이들이 있는가. 아마 거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 일에 대해 사람들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 그렇지 라고 쉽게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반만 맞는 소리다. 원하는 것을 이룬 후 허전함이 밀려오는 이유는 당신이 세상보다 크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다 가져도 세상이 당신보다 작은데 어떻게 그걸로 당신을 채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

당신이 아무리 능력이 좋고 뛰어나다고 해도 당신은 세상을 모두 가질 수 없다.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 하물며 세상보다 큰 당신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진정한 채움을 얻기 위해서는 당신을 지으신 분을 당신에게 채우는 길뿐이다. 그러면 당신은 진정한 채움으로 속에서 솟아나도록 멈추지 않는 생수를 마실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을 우리 안에 채움 없이 세상의 것을 채우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사하시기 싫어하신다. 세상의 것은 죄악과 깊이 연관이 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죄와는 결코 함께 공존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해서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거하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날마다 회개를 요구하시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참된 형통을 얻으려면 먼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을 구해서 채워야 한다. 그 후에 세상을 것을 채우면 세상의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쓰이게 된다. 내가 가진 부와 건강, 명예들이 진실로 빛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주인으로 삼지 않고 부와 건강, 명예를 갖게 되면 그것들이 주인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막고 방해하며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유혹해 마침내 우리를 죽이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모든 것을 더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참 복을, 참 평안을, 참 형통을 주시기 위해서 말이다
.

긍정의 힘의 논리가 위험한 것은 그 사상이 교묘하기 때문이다. 아예 대놓고 하나님을 반하는 내용의 서적들은 사실 크게 주의하지 않아도 된다. 그 실체가 버젓이 드러났기에 쉽게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이 무서운 것도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나기 때문이다. 주의해서 깊게 묵상하지 않으면 천사인 줄 알고 자기도 모르게 홀딱 넘어가는 것이다.

긍정의 힘도 그렇다. 단순하게 읽으면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극히 당연한 형통의 은혜를 가르치는 좋은 내용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이 책의 논리에 극찬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바뀌면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결과가 임한다. 긍정의 힘이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책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순위가 바뀌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분이시고 당신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해 항상 당신을 돌보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이 시간 가지십시오.”라는 지극히 성경적인 옳은 말을 하기 전에여러분은 먼저 하나님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가서 그분과 연합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여 주실 것입니다.”라는
예수우선주의’, '예수제일주의'의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긍정의 힘으로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나마 긍정의 힘이 사람들에게 유익을 준 부분을 찾아보라면 당장 힘든 이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잠시의 동기부여를 준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이 역시 미봉책에 불과하기에 점수는 최하점을 주고 싶다.

필자는 서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자기계발 전문 강사로 일하고 있다. 필자가 주목하고 일하는 분야는 그중에서도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다. 필자는 일에 욕심이 많아서 치유라는 글자만 들어갔다면 심리학, 마인드콘트롤, 철학서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
사람을 치유하는 기법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알았으며, 안타깝지만 어떤 기법도 사람들을 완전하게 치유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도 알았는데 아예 치유 받고자 하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은 사람이 치유 받으려하다 치료되지 못한 사람들보다 훨씬 회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왜냐면 사람은 시도하다 부딪히고 또 시도하다 부딪치는 것을 반복하면 스스로를안 돼! 역시 난 안 돼!”라고 스스로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를학습된 무능이라고 한다.

긍정의 힘은 사람들을 바로 이 학습된 무능에 이를 수 있도록 할 개연성이 높다. 왜냐면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너무나 쉽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치유 특히 정신적인 치유가 힘든 이유는 인간의 잠재의식이 죄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

DNA
구조가 발견되면서 쥐 실험 등 각종 과학실험을 통해 동식물을 망라한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기억이 유전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인간의 잠재의식은 과거 선조들이 가졌던 기억들이 유전되어 전해져 왔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기억이 대부분 좋지 않았다
.

타락 후의 황폐되어진 땅에서 사탄의 권세 아래 놓인 인생에게는 전쟁과 기아, 배고픔, 범죄, 성적인 타락 등의 안타까운 삶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조들의 기억은 대부분 어둡고 부정적이며 파괴적이었다 할 수 있다. 그 기억들이 잠재의식에 저장되어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보는 것이 전후 사정과 과학실험 등을 토대로 했을 때 옳지 싶다.(물론 필자만의 주장이다
.) 

그리고 그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잠재의식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깨어 있는 상태에서 사고하고 인지하는 활동의식은 전체의식의 약 5%밖에 안 된다. 나머지 95%는 잠재되어 있다
.

많은 과학실험 결과 실질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힘은 잠재의식이다는 가설이 있다.(
필자는 사실 잠재의식을 영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영이 육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잠재의식과 뇌 구조로 설명하겠다. 아마도 과학자 들 중 영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연구를 했기 때문이지 싶다.)

 

뇌 구조 측면에서 가령 오이를 먹지 못하는 사람은 김밥 속에 든 오이조차 먹지 못하고 구토를 하며,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유독 어떤 사람은 장미꽃 향기를 맡으면 두드러기가 일어나는 일, 전화를 하면서 운전을 하는 일 등은 모두 잠재의식이 활동의식을 지배한 예라 할 수 있다.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가상의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

어느 날 잠재의식과 활동의식이 서로 말다툼을 하다 급기야 전쟁으로까지 치닫게 됐다고 치자. 군비를 살펴보니 활동의식은 소총 10자루, 탱크 1, 비행기 2, 병사 20명이었다. 반면 잠재의식의 군비를 살펴보니 소총 100만 자루, 탱크 1,000만 대, 비행기 2,000만 대, 병사 2,000억 명이다. . 서로 싸웠다고 가정해보자. 누가 이길 것 같은가
.

물어보나 마나다. 당연 잠재의식이 승리한다. 그렇다.
인간의 의식을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잠재의식인데 그 잠재의식이 매우 부정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죄를 기계적으로 자동화 시스템처럼 짓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잠재의식을긍정적으로 사고하세요!”라고 아무리 떠들어대도 인간은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 특별히 잠재의식을 긍정으로 바꾸는 프로그램을 쓴다 해도 사람들의 긍정은 길면 몇 주 밖에 안 간다.

그런데 긍정의 힘은 쉽게 바뀔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너무나 무책임한 가르침이지 싶다.
인간의 이처럼 거대한 부정의 잠재의식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길은성령의 역사외에는 없다. 이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잠재의식을 긍정으로 바꿔보려고 별의별 짓을 다 해온 사람의 결론이니 제발 믿어줬으면 좋겠다.

거듭 강조하지만성령의 어마어마한 힘이 아니고서는 우리의 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부정적인 찌꺼기들을 절대로 씻어낼 수 없다. 아니 씻어낸 후에도 옛 구습은 여전히 남아 있어 우리를 죄짓도록 만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렇기에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말아 주소서!”라는 주기도문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을 진정한 긍정의 힘으로 이르게 하는 길은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라고 계속해 떠드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하며 그분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십자가에 우리를 못 박아 죽일 때. 그래서 내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게 되었을 때. ,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그때 야만이 우리가 참된 긍정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한 길이다.

그 길은 예수의 십자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길이다. 긍정은 그런 것이다. 긍정은 옛사람(죄에 속한 자아)이 죽을 때야 만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렇기에 조엘 오스틴 목사가긍정의 힘에서 이야기하는 긍정은 절대로 긍정일 수 없다. 아니, 애초에 긍정이 불가능한 가르침이었다. 왜냐면 긍정의 힘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가 가르치는 긍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십자가 지지 말라고 간곡히 만류하던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 다시 말해 지극히 사탄적인 사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상에 우리한국교회의 수십, 수백만의 크리스천들이 지금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해볼까.
지금 한국교회의 수십, 수백만의 크리스천들은 사탄이 던져준 달콤한 메시지를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미친 듯이 열광하며 찬양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 가고 없을 때 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형상을 보며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떠받들며 노래하고 춤추던 무지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이다



최용민 11-04-21 16:20
 
조엘 오스틴...., 목사는 미국 방송에서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계에서 이 책을 잃지 않도록 하는 운동도 있었습니다.
이 분 책은 보지 않거나 주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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