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
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 기도
2절-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절-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절-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절-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절-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8절-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9절-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절-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11절-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믿었던 친구였었는데 또, 정말 내 몸과 같이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는 아픔은 참으로 마음에 큰 상처로 남게 됩니다. 거기에다 사기까지 당하여 가진 것을 하루아침에 다 잃게 된다면 너무도 막막하고 기가 막혀, 삶의 의욕까지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부분은 우리가 매일같이 전쟁을 치루고 있는 사업터에서도, 가까운 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심지어는 가족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사실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똑같은 상황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좋은 해결책이 있으십니까?
오늘 본문의 저자인 다윗의 상황은 자신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 다윗에게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인 압살롬에게 배반을 당해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큰 아픔을 겪게 됩니다. 압살롬이 갓난아기였을 때 침대에 누워 조그만 손을 꼼지락 거리는 것을 다윗이 보면서 이 순진한 아이가 커서 자신을 배반하고 해를 끼치리라는 생각을 해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순진했던 아이가 자신을 배신하고, 거기에다 하나님의 성전보다 크고 화려한 자신의 왕궁을 빼앗고, 다윗에게로 향해 있던 수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한 순간에 빼앗아가며 다윗은 분명히 큰 절망과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 뿐 아니라,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부족하여 실날같이 붙어 있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빼앗아가고자 하는, 시퍼런 칼날의 위협을 받게 되는 “궁급하고”, “다급한 처지”가 오늘 다윗의 상황입니다. (어렸을 적 상처가 떠오르는데, 저희 집과 외할머니댁이 시골의 한 마을에 있었습니다. 매일같이 할머니 집을 놀러 가는데, 그 때에는 시골집에 개 한 마리정도는 키우는 때였었는데, 할머니 집으로 가는 그 길이 왜이리 험난하고 무서운 길이였던지, 형들하고 가다보면 집집에서 갑자기 개들이 뛰쳐나와서 물으려고 덤벼들었던, 너무 놀래서 기절할 것 같았던 마음의 상처, 뒤도 안 돌아보고 달음박질했던 생각이 나는데, 그렇게 뛰어서 할머니댁에 도착하면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심한 갈증을 느꼈었던 궁급한 상처들이 떠오릅니다. 오늘 다윗은 너무도 다급한 시퍼런 칼날을 피해 물도 없는 황무지인 유대 광야로 들어갑니다. 이제 온 몸을 바들바들 떨며 조금 숨을 돌이키려는 곤핍한 상황에서 육체적으로 심한 갈증을 느끼며 자신의 딱한 처지를 슬픔 가운데서 노래하고 있는 “비탄시”의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서 여러분들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은 다윗의 이와 같은 슬픔의 “비탄시”가 과연 기쁨의 “찬양시”로 바뀔 수 있는지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로인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 속에 궁급하고, 다급한 처지의 상황을 만나게 되었을 때 오늘 말씀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지 생각하고자 합니다.
첫째, “육체적 갈증”이 “영적 만족함”으로 바꿔질 수 있는가?
1절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다윗은 다급히 도망쳐 유대 광야에 숨었습니다. 몸이 바들바들 떨리며, 겨우 숨을 고르는데 광야라 물이 없어서 육체적으로 “심한 갈증”을 느낍니다. 그 “육체적 갈증” 속에서 다윗은 주님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바로 “육체적 갈증”이 “영적인 목마름”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 보기를 사모합니다. 또,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던 때를 생각합니다. 우리 삶에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여러분도, 다윗과 같지 않습니까? 현실적인 어려운 문제로 인해 심한 갈증을 느끼다가, 주님을 찾게 되고, 성소에서 주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주님과 평안 중에 있었던 때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점점 다윗은, 주님을 즐겁게 찬양하는데 어떻게 찬양합니까? 3절에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다윗은 무엇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했나요? 주님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즉 생명들보다 그러니까 생명과 생명의 모든 즐거움, 가장 좋은 상태에 있는 생명, 형통함 보다 “나으므로” 내가 주를 찬양하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의 인자하심이 우리의 가장 형통한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죽는 것이, 하나님의 분노 아래서 사는 것보다 수 천배나 낫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육체적 갈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생명보다 낫다는 것을 발견하고 체험하게 되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지금 현실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바라보니 더이상 “불안”이 아닌, 아무 문제가 없는 “영적 만족함”을 느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4절에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절에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결국, 다윗은 사막에서 느꼈던 육체적 곤핍과 “육체적 갈증”이 과연 “영적 만족함”으로 “승화” 되어집니다. 다윗이 “물”을 마시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인 “골수(가장 좋은 부위)”, “기름진 것”을 먹음 같다고 만족하며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궁급한 현실 앞에서 이런 고백, 이런 “영적 만족함”을 하나님께 노래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주의 오른손”이 다윗을 “멸하려는 자들의 손”에서 건져냄을 받을 수 있는가?
다윗은 말할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 더욱 주님을 갈망하는데, 6절에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다윗은 잠을 청할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도 주님을 기억하려 애를 쓰고 있습니다. 주님의 무엇을 기억하려하겠습니까? 7절에 보니 “나의 도움이 되시는 주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즐겁게 노래하는 다윗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오른손”이 다윗을 붙들어 주심으로 9-10절에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다윗을 해치려는 그들의 의롭지 못한 그 마음은 오히려 그들에게 “사망의 원인”이 되어 “땅 깊은 곳”. “음부”로 들어가게 되며, 그들의 시체는 굶주린 짐승들의 먹이가 되거나 그들의 집과 재산이 들짐승들의 거처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오른손”은 “강한 손”임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나의 도움이 되시는 그 주님을 어려운 현실보다 크게 여기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결국 “육체적 갈증”을 주는 황무지 같은 “유대 광야”는 “성소”가 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삶의 현실에서 “육체적 갈증”을 “영적 만족함”으로 승화시키시는 주님의 인자하심 때문에, 주님의 나를 향한 사랑이 오늘 이 현실 가운데서도 여전히 있기 때문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살벌한 현실의 상황에서도 주님의 “강하신 오른손”이 우리를 건져내실 뿐 아니라, 대적자를 공의로 판단하시기 때문에 황무지 같은 우리 현실의 “유대 광야”는 “성소”의 자리가 된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성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고, 그 성소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하고,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결국, 척박한 “유대광야”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소”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 곳 성소”가 “유대 광야”인 것입니다. 오늘 내 척박한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삶에 궁급하고 다급한 문제, 큰 환란과, 큰 배반의 상처가 우리에게 무섭게 다가올 때 오늘의 시편 63편(63빌딩이예요.)의 말씀을 기억함으로 “유대광야의 자리”가 하나님을 “즐겁게 찬양하는 성소의 자리”가 되어 지혜롭게 이겨나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