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절-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절-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절-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
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절-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
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 땅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 ‘약속의 땅’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의 전체적 배경을 보면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사망과 절망이 가득한 흑암의 땅’, ‘고통과 울부짖음이 끊이지 않는 파멸의 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좋았던 땅,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인 이스라엘에게 선물로 허락하신 땅이 왜 이렇게 ‘사망과 절망이 가득한 흑암의 땅’이 되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를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1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1:2,3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자녀를 애지중지하며 사랑으로 양육하였지만, 그 자녀는 부모를 거역하고 배반하는 짐승보다도 못한 ‘패역한 자식’, ‘부패한 자식’, ‘행악의 종자’가 되어서 그로인해 그 땅은 더 이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닌 이방나라들의 침략이 끊이지 않는 ‘흑암의 땅’, ‘파멸의 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2절에 그 ‘흑암의 땅’에 ‘큰 빛’이 비침으로 ‘생명과 희망의 땅’이 될 것이며 또, 이스라엘 백성에게 즐거움을 주시는데, ‘추수하는 즐거움’과 같은 즐거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완벽한 즐거움’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완벽한 즐거움은 이스라엘에게 파멸의 고통을 주는 압제자의 세력을 꺾어 주심으로 ‘압제자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즐거움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영적으로 발전시켜서 해석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을 ‘죄’로부터, ‘사단의 압제’로부터 구속하는 ‘메시야의 구원’으로 인한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부터 구원받은 기쁨과 즐거움이야말로 ‘완벽한 즐거움’이 아니겠습니까? ‘고통으로 울부짖는 흑암의 땅’이 ‘구원의 기쁨이 충만한 즐거움의 땅’으로 변화될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이방 나라들로부터 멸시 당하게 하셨던 이스라엘을 여호와께서는 이제 메시야를 통하여 높이시며, 영화롭게 하신다는 예언으로 한 아기를 우리에게 보내시는데, 그는 하나님의 하나뿐인 독생자이시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영존하시는 아버지, 이 땅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며, 평화를 주시는 평강의 왕이심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것은 메시야가 왕으로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기묘자라는 말은 신비로운 메시야의 사역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모사는 세상의 어떤 이보다 탁월한 지혜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메시야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어두움과 압제’를 끊으시고 ‘평화’를 이루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겠다”는 예언의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스라엘의 패역과 부패, 부모와 같은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행악에 포인트를 잡기 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열심’으로 인한 구원. 그 중에서도 메시야로 오시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에 포인트를 잡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기로 작정하셨는데, 메시야가 이 땅에 임하심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열심” 그 ‘열심’을 조금더 정확히 번역하면 ‘질투’나 ‘시기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이 땅에 메시야를 보내신 것이 ‘질투나 시기심’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네 맞습니다. 질투하심으로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금쪽같은 자녀들을 원수들에게 빼앗기고 싶어 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는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분의 질투하심이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켰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도 그 분의 질투하심으로 인해 얻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아 내 의지로 믿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우리가 주께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질투하심 속에는 우리를 향한 엄청난 사랑, 끝없는 사랑이 담겨져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죄로 가득한 흑암의 땅에 빛을 비추시고, 메시야를 아기로 보내시는 까닭은 그 분의 질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 사랑이 그 질투함 속에 담겨져 있고, 그 질투함은 ‘여호와의 열심’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에 빠지는 것을 질투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 중에 「동방으로의 여행」이 있습니다. 여행자들 사이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레오’라는 주인공이 있었는데, 여행자들 모두는 그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여행 중 ‘레오’가 사라져 버리자 일행들 사이에서는 내분이 일어났고, 결국에는 그 여행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훗날 사람들이 알고 보니 레오라는 하찮은 사람은 이 여행을 후원한 교단의 책임자이자 정신적 리더였던 것입니다. 이 예화를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은 ‘섬김의 리더십’이라는 것입니다. 여행을 후원하는 책임자이면서도 레오는 여행 중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섬기고 있었고, 그 하찮은 일을 하던 그가 없어지자 여행은 계속할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결국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고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화는 ‘섬김의 리더십’을 온전히 보여주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딱 맞는 예화라 할 수 있습니다. 막10:45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요13:14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씀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섬김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낮고 천하며, 짐승보다도 못한 배은망덕한 우리에게까지 오신 메시야는 우리보다 더 낮고, 천한 자리까지 내려가시는 ‘섬김의 리더십’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사야는 메시야 사역에 대해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장차 올 메시야는 어디에서 활동하게 된다고 나옵니까? 본문 1, 2절에 보시면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예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서 빛을 비추실 것입니다. 갈릴리는 어떤 땅입니까? 예로부터 이방인들의 집단 거주지였습니다.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북방 민족이 침공해 올 때 가장 먼저 유린당하는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갈릴리는 유대 사람들에게조차 멸시와 천대를 받는 땅이 갈릴리 땅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갈릴리는 ‘흑암의 땅’입니다. 그런 곳에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관심 받지 못하고 오히려 소외당하는 땅, 소외된 백성들만 숨 죽인채 살아가는 땅, 그 땅에 무슨 희망과 소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죄악으로 인해 캄캄한 흑암 속에서 겨우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빛으로 오시어 지극히 낮은 그 땅을 높여주며,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 지극히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멸시 당하고 천대받는 영혼들, 온갖 더러운 죄악에 찌들어 숨을 헐떡이는 영혼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가와 그들의 내면의 상처들 하나하나를 싸매시고, 입히시며, 고쳐주셨고, 그들의 내면에 있는 더럽고 습한 죄악들을 하나하나 청소하시며, 새 영을 부어주심으로 영혼들을 건강하게 세워주셨습니다. 바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심으로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신 메시야이십니다.
이 갈릴리라는 흑암의 땅을 내 자신의 ‘마음의 공간’으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어떨까요? 지극히 높으신 메시야가 축축하고 눅눅한 죄들로 가득한 ‘내 마음의 방’, 온갖 상처들로 구멍 난 ‘내 마음의 방’으로 오신 것입니다. ‘내가 이런 죄까지 지었다니 말도 안돼. 난 정말 구제불능이야’, ‘그렇게 결심했는데 또 같은 죄를 짓고 말았어’ 살아오면서 지었던 더럽고 추악한 죄악들이 내 어두컴컴한 마음의 방에 오래된 먼지와 함께 오랫동안 쌓였던 죄악들이 마음에 방에 여기저기 쌓여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타인들에게 ‘너 왜 그렇게 살아? 네가 잘못한 거야. 그렇게 살면 안되지’라고 잘못했다 손가락질 당한 마음의 상처들, ‘형편없는 인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을 받은 상처들, ‘누가 너를 예뻐해주고, 누가 너를 사랑하겠냐’며 사랑받지 못한 깊은 상처들이 우리 마음의 방에 가득합니다. 아무도 들어가고 싶지 않고, 누구도 들어가서 청소하고 싶지 않은 죄악으로 가득한 우리 마음의 방에, 우리 주님께서는 겸손하게 오시어 먼지를 하나하나 닦으시고, 죄악된 쓰레기를 하나하나 버리시고, 눅눅하고 축축해 곰팡이가 핀 부분에 빛을 비추어 우리를 정결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신 메시야의 ‘섬김의 리더십’은 우리를 원수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의 리더십’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그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을 본받아 우리 가정 안에서, 가족 구성원들 어느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일들을 솔선수범하고 특히나 가족 안에 건들고 들추고 싶지 않아하는 더럽고 죄악된 부분들을 과감하게 건들고 청소하며,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바꿔가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우리 사랑하는 교회 안에서도 2012년도 남들이 자원하지 않고, 하찮게 여기는 허드렛일 같이 보이는 ‘주의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힘을 쓰는 사랑하는 권속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