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여호와여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2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
3절-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4절-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이 인정되고 힘없는 용사와 같으며
5절- 죽은 자 중에 던져진 바 되었으며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그들을 다시 기억
하지 아니하시니 그들은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6절-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와 어둡고 음침한 곳에 두셨사오며
7절-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
8절-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9절-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10절-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11절-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12절-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중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13절-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14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15절- 내가 어릴 적부터 고난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께서 두렵게 하실 때에 당황하였나이다
16절-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려움이 나를 끊었나이다
17절-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러쌌나이다
18절- 주는 내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내가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본문이 주는 분위기를 느끼셨습니까? 저는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서 본문의 분위기가 굉장히 어둡고, 침울함을 느낍니다. 저자는 주님을 애타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주님을 향해 부르짖는 자신의 소리에 제발이지 주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현재 저자의 상황은 어떤 상황입니까? 3절에 “무릇 나의 영혼에는 재난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스올에 가까웠사오니” 자신의 삶에는 재난이 넘칠 정도로 가득 밀려와 버렸고, 이제는 그 재난이 자신을 덮침으로 생명이 스올에, 무덤에까지 가까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시면 자신은 이제 죽은 자들처럼 무덤에 던져지고,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의 손에 끊어진 자”로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아니라 “자신”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절망스럽습니까? 우리는 절망을 하더라도 왠만해서는 여기까지 가지 않습니다. 자신이 “주님의 손에 끊어진 자”라는 절망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절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은 소망없는 상태로 자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 저자는 말합니다. 6절에, 이제는 무덤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자신을 깊은 웅덩이와 음침한 곳, 바로 무덤에 두셨다고 말함으로 임박했던 죽음의 절망이 문맥적으로 발전하여 죽음에 이르게 되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7절에 나를 향해 발하시는 주님의 노하심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나를 누르고, 쓰나미 같은 거대한 파도가 나를 덮쳐 나는 그 파도 속에서 괴로움을 느끼다 정신이 혼미하여 결국 깊고, 음침한 스올에 눕게 되었다고 합니다. 8절에 이제 내가 알았던 사람들과 멀어진 상태가 되었으며, 이제 내가 평생 알고 지냈고, 가까이 지냈던 내 친구들에게 다시는 갈 수 없는 “갇혀진 상태”,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없는 “나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내가 너무도 아끼고 사랑한 가족들을 만지고 부를 수 없는 “흑암 속에 있는 상태”, 오히려 그 가족보다 더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은 흑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을 다시금 되짚어 보니 어떻습니까? 참으로 어두운 분위기, 쫙 깔려진 음침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지 않았나요? 그래서 시편 88편을 시편 중 가장 “어두운 시편”이라 하며, 가장 “부정적인 시편”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저는 시편 1편부터 쭉 보다가 오늘 본문인 시편 88편을 끝까지 다 읽어보았지만, 절망만 있고 소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 너무도 당혹스러웠습니다. 왜 당황했는지 그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요, 소망의 말씀인데, 오늘 본문 어디를 보아도 소망의 단어, 소망의 구절이 없기에 당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에는 “다윗의 언약 공식”을 바탕으로 한 “구원 공식”이 있습니다. 그 “구원 공식”을 통하여 “주님의 구원 계시가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그 대상이 개인이 되었건, 민족이 되었건 구원을 받게 되는데, 이 그 구원 공식을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큰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이 주님을 향해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죽게 되었습니다. 악인이 나를 삼키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현재 상태를 놓고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며 하나님께 호소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다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송축하는 부분’으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이며, 이 세상을 홀로 다스리시는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산성이십니다.”라고 말하며 그 전능하신 분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그렇게 밤낮 하나님을 갈망하고 찬양하는데도 하나님이 잠잠하시고, 움직이시지 않으실 때는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 아닙니까? 하나님 잠잠하지 마시고 일어나 악인들을 벌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성품에 호소하기도 하고, 다윗의 언약을 가져와 “저를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삼아주시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약속을 이행하시고, 속히 나를 건지시고 구원하소서”라는 다윗의 언약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을 노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이미 저에게 일어났음을 미리 선포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이렇게 다윗의 언약을 언급했을 때 하나님의 손길이 절망 속에 있는 저자를 구원하게 됩니다. 이에 저자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만족하며 기뻐하고 찬송하는 노래가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삼아주신 의인의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계시가 점진적으로 다윗의 언약을 통하여 발전하여 구원에 이르는 ‘구원 공식’입니다. 이런 구원 공식이 시편 1편부터, 그리고 시편 전체에 계속적으로 나타나는데, 유독 오늘 말씀인 시편 88편만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스럽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공식을 생각하면서 시편88편을 읽으면 ‘재난으로 시작해서 구원으로’ 끝나야 하는데, 오늘 본문 어느 곳을 보더라도 ‘재난으로 시작해서 구원’에 이르지 않고, 오히려 ‘재난으로 시작해서 죽음, 흑암에 이르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어 내려가면서 ‘분명히 뒤에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들어나겠지’라고 생각하며 기대하고 읽었는데, 그 기대는 물거품처럼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혹스럽다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 절인 18절을 읽었는데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구원계시의 점진적 발전이 아니라 정반대의 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본문을 보면서 당혹스러웠고, 참으로 의아한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생활에는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어떤 문제들이 있을까요? 크게는, 지금 현재 한국 기독교는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국 교회를 비난하는 뉴스가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같은 일에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또, 교계에서 일어나는 안타깝고, 부끄러운 모습의 문제들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어둡습니다. 또, 내 자신의 죄악된 모습에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마음이 침체되며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부흥되지 않는 부서 사역으로 고민에 빠지게 되며 깊은 수렁에 빠진 것과 같은 느낌이듭니다. 이 밖에 가정의 신앙적인 문제, 경제적으로 어려운 물질적인 문제, 회사의 해결해야 할 긴급한 문제들, 이런 모든 것들이 우리의 생활 속에 있는 문제들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해결되지 않는 여러 문제를 안고 오늘도 믿음으로 살아보고자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믿음의 싸움’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 성도들의 가정들에, 또, 우리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저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데, 본문은 ‘절망의 메시지’, ‘죽음의 메시지’ 결국,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없는 메시지만을 전해야 되는 상황이니 저에게도 절망이요, 우리에게 있어서도 힘이 빠지는 본문이 아닌가 생각하며 본문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입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말씀”입니다. “소망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중에도 분명히 소망의 말씀이 있는 줄 저는 믿습니다. 성경은 누구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까? 바로 오직 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로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신약에 오실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향해 모든 말씀이 점진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약속의 성취로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 안의 시편 또한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메시야라는 직접적 언급이 나오지 않는 시편들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모두가 동일하게 누구를 향해 가고 있겠습니까? 주님을 향해 초점이 맞추어진 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시편을 큰 그림의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시편은 크게 다섯 권의 책으로 묶여져 있는데, 제 1권은 1~41편까지, 제 2권은 42~72편까지, 제 3권은 73~89권, 오늘 본문이 제 3권에 해당되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제 4권은 90~106편까지, 마지막 제 5권은 107~150편까지입니다. 특히 이 시편들은 한 편, 한 편들을 각기 낱권으로 보는 것보다도 같이 연관해서 보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해석의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함으로 본문 속에 숨겨진 보석같은, 소망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1권의 중요주제는 “다윗 언약”을 말하고 있고, 제 2권은 “다윗의 후손”을, 제 3권은 “시온”, “성전”을, 제 4권은 “하나님의 통치”를, 제 5권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한 다윗언약의 회복”을 중요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흐름을 잘 생각해보면 다윗의 언약이 주어졌고, 이 언약이 다윗의 후손으로 이어지며, 하나님의 회복하심이 성전이 있는 시온에서 이뤄지는 순서가 딱 맞습니다.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제 3권의 중요 주제는 “시온, 성전”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아삽의 시로 시작되는 제 3권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파괴되는 아픈 역사를 그리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성전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인의 손에 침략당하고 무너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체결하신 “다윗의 언약이 실패한 느낌”을 줍니다. 왜냐하면 다윗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 후손을 통하여 영원한 시온의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으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건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약속이 이스라엘 성전의 파괴로 말미암아 실패했다고도 볼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영원한 후손으로 오는 예수님을 통해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을 시편 88편에서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제 3권의 중요 내용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시온을 중심으로 회복하신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 중 가장 부정적 시편, 어두운 시편인 오늘 본문의 88편에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키워드는 바로 “스올이요, 무덤이요, 흑암이요, 죽음의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근거를 바로 고라자손의 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고라자손의 시는 오늘 본문이 속해 있는 시편 84편부터 88편까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에서 회복시킨다는 내용을 고라자손의 시에서 잠시 찾아보면, 시84:5에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시85:1에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사 야곱의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오게 하셨으며”, 시86편은 다윗의 시가 고라자손의 시 사이에 껴있는데, 다윗의 시를 통하여 무너진 것 같은 다윗의 후손들이 회복될 것을, 다윗 왕권을 회복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87:5에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여기에서 “이 사람, 저 사람”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사람”이라는 히브리 단어는 “탁월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는 최상급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탁월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 “탁월하신 지존자”께서 친히 어디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까? 무너진 시온을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무너진 성전과, 무너진 다윗의 왕권, 시온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회복되는 구도를 보이다가 시편88편에는 회복이 아니라 아주 무너지고, 무덤으로 들어가는, 흑암으로 들어가는 부정적인 구도로 마무리를 한다는 것이 이상한 듯 하지만 거기에는 숨겨진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같은 부정적인 마무리 구도에서 우리가 소망을 바랄 수 있는 것은 시편88편에서 의미하는 스올, 무덤, 흑암, 사망은 “예수님의 죽으심”,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인 “무덤”과 맞물린다는 것입니다. 시편88편의 저자인 에스라인 헤만이 재난 가운데 주께 구원을 부르짖었지만, 구원받지 못하고 거절을 당해 흑암에 들어갔다는 것은, 메시야이신 주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철저한 외면하심, 철저한 거절당하심 가운데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망의 자리에 누우신 것을 의미한다는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사망은 영원한 사망, 영원한 절망이 아니요. 오히려 모든 사람들을 살리는 소망의 사망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둡고, 음침한 골짜기인 깊은 웅덩이에 들어가심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에게는 어떤 소망을 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회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구원을 생각하면, 오늘 시편88편의 어둡고 침침한 절망스러운 분위기에서 우리는 소망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어떤 은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철저히 외면당한 예수님의 ‘죽으심의 자리’는 오히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연결되는 ‘소망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88편의 본문에 나타난 절망적인 스올, 무덤, 죽음의 자리는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죽으심’이라는 소망이 숨겨져 있고, 희망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여러 문제로 소망이 없는 이 현실 가운데 우리에게 어느 무엇이 소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잘 나가고, 능력이 있으며, 높은 직책에 앉은 사람이 지금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소망이겠습니까? 고급 빌라와 멋진 슈퍼카를 소유할 수 있는 돈다발과 같은 물질이 소망이겠습니까? 우리는 현재 무엇을 소망으로 삼고 있습니까? 위와 같은 모든 것들은 우리 삶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소망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음의 자리로 들어가신 예수님만이 우리 삶에 진정한 소망이 되십니다. 예수님 외에 어떤 그 누구도 죽음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길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고, 생명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참 복음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애타게 구원을 부르짖는 저자의 처절한 음성에 하나님은 구원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진 본문의 겉표면을 꿰뚫고, 그 내면을 보았을 때에는 우리를 위해 잠시 사망의 자리에 계신 예수님, 영원한 사망이 아니요, 모든 사람들을 영원히 살리는 구원의 사망, 소망의 사망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 모든 것에 있어서 예수님 외에 다른 것으로 소망을 삼으면 안 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진정한 소망이십니다. 지금 내 삶에 헤만과 같이 재난에 빠져 거대한 짓누름이 있습니까? 거대한 쓰나미 같은 파도가 나를 덮쳐 숨이 콱 막혀 오르고, 정신이 희미한 중에 있으십니까?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끈질기게 나의 발목을 잡아 스올로 나를 이끌어 내리는 것들이 우리 삶에 있으십니까? 스올에 들어간 것 같고, 주님의 손에서 끊어진 자처럼 여겨지십니까? 오직 사망의 자리를 이기신 예수님으로 소망을 삼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정을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주님께 그렇게 부르짖었는데도, 신앙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것 같아 보이고, 절망 밖에 없는 것처럼 여겨지십니까? 오직 사망을 이기신 예수님으로 희망을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 사랑하는 교회가 어렵고, 힘든 것 같습니까? 그동안 부흥을 외치고 기도하는데, 주님께서는 거절하는 것 같이 잠잠하다고 느껴지십니까? 교회의 머리이신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 교회의 소망이 되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오직 예수님만을 소망으로 삼고,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옮겨주신 예수님께 날마다 깊은 감사를 드리며, 삶을 주님께 다 맡기고, 의지하며, 내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