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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신자로 살아내는 기회로!(요한계시록 강해25)
 본문말씀 : 계3:1-6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20.2.19
조회 : 10,014   추천 : 0  
본문 : 계3:1-6절   요한계시록 강해25
제목 : 신자로 살아내는 기회로!    

  들어가는 말  
 우리 말에 ‘좋은게 좋은 거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좋은게 좋은게 아닐 수 있습니다. 세계 여러나라 가운데 국민이 세금을 내지 않는 나라가 몇 나라가 있습니다.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모나코라는 나라는 관광산업으로 국가 재정이 충당되어서 국민에게 세금을 걷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브루나이와 카타르라는 나라도 국민에게 세금을 걷지 않는다고 합니다. 국민이 살기 좋은 나라인 듯 합니다. 그러나 세금을 걷지 않는게, 잘 사는게 다 좋은 것은 아닌 예도 있습니다. 호주와 하와이 사이에 있는 섬나라인 ‘나우루’ 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수렵과 채집을 통해서 먹고살던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1980년이 시작하면서 인광석이라는 천연자원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하루 아침에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민에게 세금을 부과하지 않았고, 심지어 매년 1억원씩 국민에게 생활비를 제공하고, 결혼을 한 부부들에게는 집을 주고, 교육, 의료비까지(호주로 원정 치료, 환자를 간병하기 위한 병원 인근의 집을 구해줌) 완전 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날 무렵 천연자원이 바닥나게 되었고, 설상가상 지나치게 게으른 생활이 습관화되고, 국민이 지나치게 비만하게 되어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이전 보다도 더 못사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것은, 좋은 환경, 좋은 현실, 편안하게 잘 사는 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아무 문제없이 부유하고 잘사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회개하지 않음 때문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들었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라고 책망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그들의 행위가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열심 있는 신앙의 행위가 있었지만, 그것은 온전한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온전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하면, 신앙의 이중성을 말합니다. 예를들면, 교회안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즉, 교회안에서는 거룩한 신자처럼 보이지만, 교회 밖에서는 세상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데교회안에 성령의 역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배는 드리지만 성령의 임재가 없었고, 찬송은 부르지만 성령의 위로가 없었고, 말씀과 기도를 하지만 성령의 감동이 없었고, 봉사와 섬김을 하지만 성령의 은혜가 없고..., 한마디로 성령의 역사가 없었던 교회인 것입니다. 이 점은 사데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일곱영이 의미하는바가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성령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모습이 그들의 부족과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가 신앙의 이중성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가 없는 교회가 되고만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소홀’했고, 교회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데교회 성도들은 성경을 가지고 다녔지만, 성경에 소홀했습니다. 사데교회 목회자들은 정해진 설교시간에 설교를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깨우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설교를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데교회 성도들은 이중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 교회안에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 곧 진리안에서 진리를 따라서 역사하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가 된 것입니다.

 오늘도 역시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지금 주님은 사데교회에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지금 사데교회가 자신들이 과거에 잘못했던 것을 회개하라는 촉구만이 아니라, 사데교회가 죽은 교회가 되고만 이유와 원인, 참다운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일 사데교회가 말씀에 소홀하고, 신앙의 이중성에 대한 회개를 했다면, 그들은 결코 죽은 교회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를들면, 사람이 병에 걸려 죽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병이 시작 되었을 때, 어떤 이유에서든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게 시작한 병이 커져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데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데교회가 정말 처음부터 죽은 교회였겠습니까? 아닙니다. 다시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은 처음에는 주님이 보시기에 잘했다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교회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에 소홀하고, 이중성적인 삶을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가 회개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하지만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죄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왜 죄라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죄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많은 선지자들이 회개하라고 말해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시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동일하게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버리지 않으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죄를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살인을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만 기준한다면 살인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거나 회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움, 무시, 멸시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기준한다면, 살인죄를 지었다고 인정하고 회개하게 될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죄의 기준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성경을 보지 않고 하루를 사는 것, 기도하지 않고 사는 것, 원망과 불평을 하는 것, 미움을 갖는 것...., 이런 것들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 지은 것이 없고, 따라서 회개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 분명한 기준, 죄의 엄격한 기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의 기준입니까? 성경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심, 서로의 유익이 기준이어야 합니다.(고린도교회의 우상의 문제, 술, 담배의 문제) 그리고 엄격한 죄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갈 때, 매일 회개하는 삶, 곧 여러분을 건강하고 생명력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조건이나 현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다르게 묻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못하고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현실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예를들면,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현실이 좋으면 즉, 잘 먹고, 잘 살고, 잘 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고, 반대로, 못 먹고, 못 살고, 잘 안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소개하는 사데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사데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 교회가 있는 도시의 특성상 대단히 잘 사는 부유한 교회입니다. 어느 것 하나 부족하지 않는 넉넉한 교회입니다. 또한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진 곧 대단히 유명한 교회였고, 명성이 높았고, 대단한 명예를 가진 교회였습니다. 즉, 다른 교회가 부러워할 만한 교회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사데교회는 다른 도시의 교회들에게 있었던 핍박이나 박해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적의 공격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사데교회는 어떤 것도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없는 전혀 어려움이나 문제가 없는 교회였습니다. 이 정도라면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신앙생활을 잘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인 교회, 못할래야 못할 수 없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데교회는 탁월한 조건과 현실을 가진 교회로서 교회 다웠을까요? 신자다웠을까요? 정말 신앙생활을 잘했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도 이미 잘 알고 있는데로, 온전한 행위가 없고, 성령의 역사가 없고, 그래서 죽은 교회라는 책망을 받는 교회였습니다. 이제 반대로 생각해봅시다. 이미 우리들이 살펴본 교회 가운데 가장 궁핍한 교회, 그리고 가장 많은 환난을 당한 교회를 말한다면, 바로 ‘서머나교회’ 일것입니다. 계2:9절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고 말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10절을 보면, 앞으로도 고난과 환난을 받게 될 것까지 예고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정도라면 우리의 생각에는 신앙생활을 잘 할래야 잘 할수 없는 교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랬을까요? 전혀 압니다. ‘네가 부요한 자니라’ 라는 칭찬만 받은 교회였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생각해봅시다. 이번에는 한국교회 북한의 교회로 생각해봅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북한의 교회와 비교를 한다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조건, 좋은 현실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고, 얼마든지 예배, 찬송, 기도를 할 수 있는 보장된 처소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법으로 보호를 받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한국교회는 세상에 대해서 힘도 발휘하고 목소리도 높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한교회는 어떨까요? 북한을 신앙인들의 무덤이라고 까지 부릅니다. 무슨 말입니까? 북한에는 신앙의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수도, 신앙생활을 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이 발각되면 정치범 수용소에서 온각 고문과 학대를 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죽임까지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면 안된다고 걱정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네 당연히 그러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생각해봅시다. 한국교회와 북한교회 가운데 어느 교회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을까요? 숫자가 많고, 교회가 많냐는 질문이 아닙니다. 누가 더 신자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냐는 질문입니다. 한국교회라고 정말 자신 있게 말씀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면에서 한국교회는 사데교회화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북한교회 성도들이 서머나교회처럼 더 진실하고 더 신실하다는 생각은 안드십니까? 또, 좀 솔직히 생각해봅시다. 한국교회가 공산화되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편안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입니까? 진실하고 정금 같은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입니까? 그리고 분명한 것은, 한국이 공산화 된다해도 교회와 복음은 망하지 않습니다. 복음 무엇에도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니 공산화 되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공산당이 싫어요~ 

 여기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조건과 현실은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다시말해, 조건과 현실이 좋다고 해서 신앙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반대로 조건과 현실이 나쁘다고 해서 신앙에 방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나쁜 조건과 현실이 우리의 신앙을 더 온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고난의 유익, 욥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 물론, 잠시는 그렇게 보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은 조건이나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들면,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청년을 보십시오! 그는 대단히 큰 부자였을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누구보다도 좋은 조건 좋은 환경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좋은 조건과 환경이 그 부자청년의 신앙과 믿음에 유익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도리어 걸림이 되었습니다. 그 부요함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다. 사르밧과부를 아시지요?(왕상17장) 이 과부에게는 어린 아들 하나만 있었습니다. 의지할 것이 없는 여인입니다. 설상 가상 너무나 가난해서 한끼 먹을 양식 말고는 먹을게 없는 사람입니다. 정말 나쁜 조건과 환경입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그 남은 양식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르밧과부는 그 남은 한씩 식사를 엘리야선지자에게 줍니다. 여러분! 과부, 가난이라는 나쁜 조건과 환경이 사르밧과부의 신앙과 믿음을 방해했습니까? 아닙니다. 또, 여러분은 부자와 거지나사로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눅16장). 말 그대로, 최상의 조건과 환경의 부자(자색옷, 고운 베옷, 호화호식)와 최악의 조건과 환경의 거지(헌데투성이, 대문앞에 버려짐, 음식을 주워먹음)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무얼 말하려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들이 살면서 만나는 조건이나 환경은 결코 우리의 신앙과 믿음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이 땅에서의 조건과 환경보다 더 차원(수준)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수준이 하나님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함과 같습니다.

 그런데 불구하고, 때로는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조건과 환경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스스로가 신앙의 올바르지 못함을 조건이나 환경으로 핑계와 구실(정당화)을 삼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여러분은 달란트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주인이 먼 나라로 가면서 3명의 종에게 각 각 5,2,1달란트를 맡깁니다. 그리고 5,2달란트 받은 종은 열심히 일해서 5,2달란트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1달란트만을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한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충성되지 못함을 감추기 위해 주인이라는 조건과 환경을 핑계와 구실로 삼은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주인은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고 핑계과 구실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가 1달란트 받은 종과 같지 않을까요?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과 현실속에서 신앙생활을 더 잘 할 수 없다고 하나님 탓을 하고 있는 분은 안계십니까?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하나님 일을 합니까?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순종합니까? 이런 형편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합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어떤 조건이나 환경이 우리의 신앙과 믿음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위대한 신앙고백이 무엇입니까? 빌4:11-13절을 보면, ‘내가 어떤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어떤 조건이나 환경을 탓하지 말아야 합니다.
  
  3.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습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못하고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조건과 현실이 아닌, 여러분의 마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을 하면, 좋은 조건이나 현실이든, 나쁜 조건이나 현실이든 신앙의 기회로 삼겠다는 마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을 하면, 지금 나에게 주어진 조건과 현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조건과 현실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내겠다는 마음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다시 달란트비유를 생각해봅시다. 주인은 종들을 불러 각 각의 재능대로 5,2,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5달란트 맡은 자는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5달란트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2달란트 받은 종도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2달란트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그 받은 것을 숨겨두었습니다. 전 이비유를 묵상하면서, 3명의 종에 가장 훌륭한 종이 2달란트 맡은 종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5달란트 맡은 자를 보면서, 주인이 날 이 정도로 평가하는가? 이것 가지고 뭘 할 수 있냐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조건과 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달란트 맡은 종은 원망과 불평이라는 반응이 아닌 2달란트 주어진 조건과 현실속에서 충성된 종으로서 살아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자세가 조건이나 현실보다 비교 할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데교회가 이러한 마음이 없었고, 오늘 우리들이 이러한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조건, 좋은 현실만 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조건 현실이든 아니면 나쁜 조건 현실이든지 지금 하나님이 내게 격게 하신 그 순간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겠다는 마음을 결심하십시오! 이것이 신앙을 결정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신앙생활을 잘하고 못하고는 주어진 조건이나 현실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주어진 조건과 현실은 나의 신앙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그 조건과 현실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겠다는 충성된 마음이 신앙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었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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