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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불꽃같은 눈 주석 같은 발!(요한계시록강해23 )
 본문말씀 : 계2:18-29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19.12.18
조회 : 9,331   추천 : 0  
본문 : 계2:18-29절   요한계시록 강해23 
제목 : 불꽃같은 눈 주석 같은 발!  

  들어가는 말  
  어느 수도원이 있었고, 그 수도원에는 나이 많은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원장이 특별히 사랑하는 제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자는 외모가 볼품없고, 머리도 별로 좋지 않고,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이 전혀 없는 제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제자를 각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제자들은 마음에 늘 불만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수도원 원장이 제자들을 모두 모아놓고 새 한 마리씩을 주면서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죽인 후 다시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제자들 모두 죽은 새를 가지고 다시 모였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각별한 사랑을 받던 그 제자는 살아 있는 새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은 말귀도 못 알아 듣는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때 원장이 물었습니다. ‘왜 새를 죽이지 않았느냐?’ 그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데 아무리 외진 곳, 으슥한 곳을 찾아가도 하나님이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어요.’ 이때 원장님이 다른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이 제자를 각별히 사랑하는 이유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주님이 불꽃같은 눈으로 모든 사람을 보고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석 같은 발로 심판하시는 분이라고 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의 불꽃같은 눈과 주석같은 발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불꽃 같은 눈!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서 두아디라교회에 보낸 편지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자칭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2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당시 두아디라지역은 상공업이 발달 했고, 따라서 상공업을 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노동조합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에 가입을 하려면, 우상숭배에 참여하여야 하고, 더불어 우상 신전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음행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우상숭배에 참여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가입을 하고 싶어도 신앙이라는 이유 때문에 가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로서 노동조합에 가입할 정당한 명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노동조합에 가입할수 없었고, 많은 손해와 불이익을 격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자칭 선지자고 주장하는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에게 스스로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말하며, ‘육체로 하는 일은 영혼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음이 중요하다’ 라는 교훈을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세벨의 교훈은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싶었던 신자들에게 너무나도 그럴듯한 명분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교훈삼아야 할 것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 어떤 말과 행동을 정당화 하기 위한 명분 찾는 일을 하면 안된다는 점입니다. 계속 명분을 찾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더 깊은 죄 가운데 빠져들게 되고 말 것입니다. 둘째는, 이세벨이 초월적 신비적 능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세벨은 말만 잘하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초월적인 능력, 신비한 능력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은 이세벨의 교훈을 더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세벨의 초월적인 능력이 24절의 ‘사탄의 깊은 것(속임수)’ 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교훈삼아야 할 것은, 건강한 신앙은 초월이나 신비를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하고 따라가는 신앙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우상숭배에 빠지고 행음에 빠지게 된 것은, 명분을 찾았기 때문이며, 이세벨의 초월적인 능력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진 더 본질적인 이유(신앙적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 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대로 말하면, 18절에 ‘불꽃 같은 눈으로 보시는 주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23절에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즉,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가 하는 행동을 아시고, 행동의 이유도 아시고, 우리의 숨겨진 생각, 숨겨진 의도...., 등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분이라 점을 의식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감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숨길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은 이런 주님을 인식, 또는 의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숭배와 음행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만약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그래서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인식, 의식했다면 그들이 우상숭배와 음행을 그리 쉽게 용납하고 빠졌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은 불꽃같은 눈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것을 꽤뚫어 보시고, 모든 것을 다아시는 분이라는 인식, 의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코람데오란 무슨 의미입니까? 라틴어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입니다. 이 말이 공식적으로 쓰여지게 된 것은 16세기 중세시대에 처음으로 사용된 표현입니다.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중세시대는 기독교역사상 가장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대로서 영적인 암흑기로 여기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에게 의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때입니다. 바로 그때 종교개혁자들이 신앙의 각성, 신앙의 회복을 위해 외쳤던 5대 슬로건이 있는데,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인데, 이 5대 슬로건의 기초가 되는 신앙관이 바로 ‘코람데오’ 였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즉, 영적으로 타락하고, 신앙이 어두워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 바로 코람데오라는 신앙의 인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지금의 나의 모습, 나의 행동,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감정, 나를 보시면서 어떻게 여기실까? 과연 칭찬하실까? 책망하실까? 기뻐하실까? 스퍼하실까? 또는 과연 이것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일까? ...., 등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살피는 일을 잃을 때 신앙의 타락과 영적인 침체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코람데오를 외치며 신앙의 각성을 촉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을 살피는 코람데오의 신앙을 잃으면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처럼 신앙의 타락과 영적인 침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오늘날 한국교회가 변질되고,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침체하여 세속화 되어 가는 이유 역시, 코람데오의 신앙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속(예배, 직분, 사명, 삶)에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얼굴을 살피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십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살피십니까? 하나님의 평가는 살피십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신 분이시기에 어떤 모양이나 형체를 가지지 않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항상 보이는 분처럼 여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코람데오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비로서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고, 나의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고, 고칠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요셉은 보디발 장군의 집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여주인의 유혹을 받습니다. 혈기왕성한 청년으로서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주인의 명령이고 이를 어기면 불이익이 생길건 뻔한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장소에 단 둘이만 있었습니다.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유혹을 뿌리쳤습니다. 요셉이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코람데오의 신앙때문입니다. 창39장을 보면 요셉이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찌 범죄하리오’ 요셉은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처럼 여긴 사람인 것입니다. 또 다윗 역시 코람데오의 신앙을 갖었습니다. 시139:1-4절을 보면, 잘 알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래서 다윗은 나단선지자를 통해서 자신의 죄악을 지적받을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고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코람데오의 신앙 불꽃 같은 눈을 가지고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신자들은 순결하고, 거룩하고, 더 성숙하여 가는 신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보이는 하나님으로 여기며,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평가를 살피며 살아가는 코람데오(반, 코람안드로포스 :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나?) 신앙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빛나는 주석 같은 발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이세벨의 교훈은 용납한 또 한가지 본질적인(신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인식 또는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두아디라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8절 ‘발은 빛난 주석과 같은’ 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인 소개는 22절에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이며, 23절에‘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이며, 27절에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입니다. 여기서 철장이란 쇠막대기를 말합니다. 결국, 모두 같은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행위대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벌을 주시는 심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당하고 올바른 신앙에 대한 보상을 주시는 심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들면, 26절에‘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또, 28절에 ‘새벽별을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조금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의 악행에 대해서 주님이 벌이라는 심판을 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주님은 분명히 각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임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셨고, 계획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했던 노아시대 사람들을 심판하셨고, 타락한 소돔성을 심판하셨고, 애굽왕 바로를 심판하셨고, 아말렉을 심판하셨고,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한 아간을 심판하셨고, 교만한 이스라엘 군대를 심판하셨고, 불순종한 사울왕을 심판하셨고, 간음과 살인한 다윗을 심판하셨고, 범죄한 북이스라엘과 범죄한 남유다를 심판하셨고..., 그리고 최후의 날 모든 사람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벌을 주고, 잘못에 대한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기 위함일까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우리 신자들에게는 결코 아닙니다. 다르게 말하면, 주님은 우리를 객관적인(제3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 어떤 관계나 감정이 없이 잘 잘못만 보는 관점, 세상 법관) 입장으로서 심판하시지 않습니다.(부모의 입장- 속상함, 안타까움, 돕고자 함..., 등)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 믿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사랑이 이유입니다. 더나가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들의 이유 역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근거로 우리들에게 가르치시고자 하는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훈입니까? 첫째는, 우리의 잘못과 불순종이 만들어 내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인가요? 불행이고 고통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주님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운명에 내버려 두시지 않는 분이라는 점을 가르치시고자 함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가지는 주님께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을 근거로 우리의 잘못된 것을 고치시고, 세우셔서 우리를 더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 다양한 모양으로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더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의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의식하며 살아가십니까?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처럼, 우상숭배에 빠지고, 행음하게 되고, 죄를 짓게 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 앞에 있음을 인식하고, 의식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분이심도 인식하고 의식하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을 향해, 우리고 우리 모두를 향해서 주님이 주시는 권면입니다.

  3.주님의 시선과 심판이 인식되지 않는 이유?
 우리는 지금까지 불꽃 같은 눈을 가지고, 주석같은 발로 심판하실 주님을 의식하고 인식하고 살아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왜 주님의 불꽃같은 시선과 주님의 엄중한 심판을 의식, 인식하며 살지 못하는가?’ ‘주님의 시선과 심판이 의식이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서입니다. 과연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억력이 나빠서 일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신앙이 없어서일까요? 

 과연 주님의 시선과 심판이 의식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가 너무 적나라하게 이야기해도 양해바랍니다. 첫째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시선에 관심없고, 주님의 심판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주님의 시선, 주님의 심판을 의식 할 만큼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의 시선이 의식될 것이고, 주님의 심판 곧 평가가 의식 되는건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예를들면, 우리가 연애를 할 때, 상대방의 시선이 의식이 되고, 상대방의 평가나 말을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 예쁘고 치장하고, 더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식어지면 상대방의 시선, 평가에 대한 의식이 줄어가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시선과 심판이 의식되지 않는 이유는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시선과 심판을 너무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분명히 주님의 시선을 느낀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꾸중도 느낀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선을 외면하고, 꾸중도 외면하는 일이 많아 지면서 여러분의 마음이 강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주님의 시선과 심판이 의식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말씀 곧 성경을 멀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난 3일간 성경 좀 읽으셨습니까? 묵상 좀 하셨습니다. 그리고 묵상 가운데 은혜도 받고, 묵상 가운데 주님을 좀 만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시선이 전혀 의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인 성경은 서로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말씀을 멀리하기 때문에, 말씀 속에 담겨진 주님의 시선을 배우지 못하고, 말씀속에 담겨진 주님의 심판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의식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은 이세벨의 교훈은 용납하고,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주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죄와 유혹에 넘어지고,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의 시선과 주님의 심판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선과 심판에 대한 의식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성경으로 돌아가십시오! 매일 말씀을 묵상하십시오! 그래서 말씀속에서 주님의 시선을 느끼고, 말씀속에 주님의 심판을 배우십시오! 그래서 매일의 삶이 코람데오가 됨으로 죄와 유혹에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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