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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초월이 아닌 말씀!(요한계시록 강해22 )
 본문말씀 : 계2:18-29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19.12.11
조회 : 5,750   추천 : 0  
본문 : 계2:18-29절   요한계시록 강해22 
제목 : 초월이 아닌 말씀!  

  들어가는 말  
 21세기가 되자 신학전문가들이 예상한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 운동이 전세계 기독교계를 주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오순절 운동(Pentecostalism)이란? 성결운동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방언이나 신비한 은사, 그리고 체험과 병고침 등과 같은 초월와 신비, 기적을 강조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남미지역과 아프리카를 시작으로 오순절 운동이 세계로 확산되었고, 우리나라 역시 오순절 운동(신사도운동)이 대단히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고,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운동에 매료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순절운동, 또는 신사도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이유? 또는 성도들이 이러한 운동에 매료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초월과 신비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초월과 신비에 매료되어 거짓 가르침을 용납하게된 두아디라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추구하고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 더욱 올바르고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초월을 따르면 안됩니다.
 우리는 지난시간 두아디라교회가 받은 칭찬이 무엇이며, 그들이 받은 책망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그들이 받은 칭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업들이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섬김으로 증명되는 사랑이 있었고, 인내로 증명되는 믿음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들이 칭찬을 받은 것은, 사업, 사랑, 믿음이 갈수록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즉, 신앙의 행위와 내용이 증증일상(蒸蒸日上)했다는 점을 칭찬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가 책망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2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을 용납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들의 잘못을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이세벨을 용납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이세벨을 용납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르게 말을 하면, 이세벨의 교훈과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2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로, 자신들의 죄와 욕심을 ‘정당화할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명분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서는 ‘표면상 내세울만한 이유 또는 명목’이라고 말을 말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진짜 또는 솔직한 이유는 아니지만, 사람들에게 납득시킬만한 정당한 이유를 말합니다. 예를들면, 요12장을 보면, 마리아라는 여인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때 가룟유다가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라고 말하며 그 여인을 꾸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속셈은 달랐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고 말합니다. 즉, 여인을 꾸중하는 이유는 가난한 자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훔쳐갈 돈이 생기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포장하고 그럴 듯 하게 보이기 위한 거짓된 이유를 명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두아디라교회 성도들 역시 이러한 명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두아디라 지역은 상업 중심의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상인들의 권리와 유익을 보장해주기 위한 노동조합이 매우 발단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우상 신전에 가서 우상숭배를 해야 하고, 우상 신전에 있는 여인들과 행음을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 하고 싶어도 여러 이유로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먹고 살길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상숭배와 행음의 일을 하기 위한 그럴듯한 이유 곧 명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자칭선지자라고 말하는 이세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니골라당(헬라사상)과 같은 주장인 ‘육체로 하는 일은 신앙과 무관하고, 마음이 중요하다’‘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고 교훈하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에게는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너무나도 좋은 명분이 생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세벨이 누구입니까? 스스로를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라고 주장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이세벨을 용납한 이유는, 정당한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을 찾은 결과 그들은 서슴없이 우상숭배와 음행이라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문제는 그 명분 때문에 자신이 범한 죄를 죄가 아니라고 여겼고, 그래서 회개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명분을 찾는 일은 너무나 잘못된 일이고, 신앙적으로 위험한 일인 것입니다.(예, 아담과 하와의 범죄때, 사울왕이 가축을 죽이지 않은 이유를 번제에 쓰려고 라고 말할 때)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 역시, 너무나 쉽게 명분을 찾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들면, 내가 그렇게 말한 것에 대한 명분을 찾고, 내가 그렇게 행동한 것에 대한 명분을 찾고, 내가 그러한 선택과 결정을 한 것에 대한 명분을 찾고, 내가 옳다는 명분을 찾고..., 이렇듯 정당한 명분을 찾는 습관 때문에 우리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결국 회개하지도 않는 신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명분을 찾는 것은 정말 나쁜 습관이고, 자신을 더 깊은 죄악으로 몰아넣는 위험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어떤 일에 명분을 찾는 나쁜 습관을 중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세벨의 교훈과 가르침을 받아들인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자칭 이세벨이라는 여인이 언변에 능했고, 무엇보다도 ‘초월적인 신비한 능력’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당신 문헌을 보면, 이세벨은 대단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녀는 뛰어난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예언을 했으며, 어떤 신비한 일을 행하고, 초월적인 일을 행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이세벨의 교훈을 용납하지 않은 사람들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 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세벨이 사탄의 능력을 빌어 이적과 기적, 신비와 초월적인 일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비와 초월적인 현상을 목격한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이세벨을 참 선지자로 여기고, 그의 교훈과 가르침을 쉽게 용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에도 현대판 이세벨을 용납하는 성도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미 설교 시작 때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순절운동, 신사도운동이 현대판 이세벨이라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이들은 신비와 초월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오면 신비와 초월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예를들면, 의사도 고치지 못했던 몇 년된 병이 나았다, 암세포가 줄었다, 두통이 나았다, 금이빨이 되었다, 그 밖에도 정말 다양한 병명을 말하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와 초월을 보고 경험하고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그리고 이단이라고 말을 해주어도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깊은 것’입니다. 이렇듯 신비와 초월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알아야 할 것은, 어떤 면에서 축복을 강조하는 것 역시 사탄의 깊은 곳일 수 있다는 사실도 잊으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축복은 결국 초월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가운데 신비와 초월에 마음이 빼앗기는 일이 없기를, 그래서 사탄의 깊은 것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2.초월적 사건은 신앙에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 신앙안에 신비적 사건, 초월적인 사건이 없다고 말하는게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안에는 신비적 사건, 초월적인 사건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날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모든 역사와 시간 가운데 수없이 많은 신비적 사건과 초월적인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들면, 죽지 않고 천국에 올라간 에녹이나 엘리야, 폭풍속에서도 깨어지지 않은 노아의 방주, 100세된 할아버지와 경수가 끊어진 90살된 할머니가 아들을 낳은 것, 홍해바다가 갈라지는 것, 만나가 내려진 것, 반석에서 물이 난 것,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 가나안 정복 당시 태양이 멈추게 된 것,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고침 받은 것, 히스기야왕의 불치병이 고침받고 그 증명로 태양이 뒤로 10도 물러난 것..., 등 그리고 아기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것, 예수님께서 불치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 오병이어 사건, 물위를 걸으신 사건, 풍랑을 잔잔하게 하신 사건, 그리고 초대교회 시대에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 제자들이 감옥에서 천사의 도움으로 풀려난 것, 베드로가 환상을 본 것, 바울이 독사에 물려도 죽지 않았던 것, 바울의 손수건으로 병든자를 고친 것..., 등 이렇듯 성경안에는 신비하고 초월한 사건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역사속 신비하고 초월적 사건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말씀대로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고,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고, 초월적인 능력을 온 세상을 다시리고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에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이 많다고 해서, ‘신비와 초월을 목적하는 신앙’을 갖아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비한 사건, 초월적인 사건이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우리 사랑하는교회 안에서 병든자가 고침받는 일들이 일어난다면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나, 그것을 목격한 사람의 신앙에 큰 도움이 될까요?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잠시 잠간 그렇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신비와 초월을 목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참다운 신앙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사탄의 깊은 곳에 빠지게 됩니다. 오래전에 어느 책에 읽은 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어느 교회의 한 목사님이 병원에 심방을 가서 아픈 성도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일뒤 그 성도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목사님은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성도들 사이에 목사님이 기도해주시면 낫는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고, 결국, 목사님도 자신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아픈 성도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기도를 해주었고, 많은 성도들의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본 교회 성도뿐만 아니라, 타교회 성도들까지 많이 찾아왔답니다. 그리고 심지어 불신자들까지도 돈을 들고 찾아오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자 목사님은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이 주님이나 복음이 아니라, 단지 병 낫는 것에만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목사님은 하나님께 신유은사를 거두어 가시기를 기도했고, 하나님은 거두어 가셨답니다.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그 목사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신유의 은사라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그 사람에게 신앙의 유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본다고 해서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은 너무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하나님께서 애굽나라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사건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사건은 재앙의 사건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재앙이 애굽사람이 거주한 곳에만 내리도록 하셨기 때문이고, 초자연적인 일들(피, 개구리, 메뚜기, 흑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초월적인 사건으로 통해서 애굽왕 바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생겼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도리어 마음이 강팍해 졌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만나를 40년간 주시고, 불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보살피시고, 옷과 신이 낡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출애굽1세대들에게 신앙의 도움을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끊임없이 원망을 했기 때문입니다. 또, 광야 40년간 하나님이 행하신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의 소문을 보고 들은 가나안 땅 사람들은 믿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물론, 몇 몇 소수의 사람들은 믿음을 갖았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신비와 초월이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나는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예를들면, 병든자를 고치시고, 불치병자를 낫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귀신들린자를 고치고, 물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잔잔하게 하시고, 물을 포도주 되게 하시고,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시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꽤뚫어 보시고..., 그렇다면, 그러한 신바와 초월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았을까요? 아무 500여명 정도는 그러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친 군중이 되었습니다. 또, 그러한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은 것을 목격한 제자들, 또 친히 초월적인 일을 행한 제자들에게는 신앙의 유익이 있었을까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세상적인 메시야만 생각했고,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만 생각했습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신비와 초월적인 사건은 우리의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신비와 초월을 추구하고 목적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엉뚱한 신앙이 되고, 올바른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3.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신비와 초월이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신비와 초월적인 일을 행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 대해서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신비한 일을 행하시고, 초월적인 일을 행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를들면, 애굽 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정말 신비하고 초월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것을 체험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애굽의 신은 헛된 것이며,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하신 신이라는 것과 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와 초월적 사건의 목적입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정말 신비한 체험이고 대단한 체험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체험을 하게 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며, 의지할 자임을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많은 신비와 초월적 사건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랑, 과시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을 보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렇듯, 모든 신비와 초월적인 사건은 하나님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더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다양한 신비와 초월적인 사건을 보이셨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10가지 재앙, 홍해사건, 아말렉 전투, 불과 구름기둥, 만나, 반석의 물..., 등 그러면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간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시내산입니다. 그러면 시내산에서 무엇을 주었습니까? 십계명 곧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비와 초월적인 사건을 경험케 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따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을 통해서도 확인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양한 신비와 초월적인 사건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살아나는 사건까지 보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이 하신 모든 말씀이 참이고 진리임을 증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과 교훈을 붙잡고, 그것을 삶의 원리로 삼고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와 초월적 사건이 목적하는 바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비와 초월적인 사건의 목적은, 아직 신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 말고 다른 목적은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신앙, 건강한 신앙은 결국, 신비와 초월을 목적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목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따라가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래야 합니다. 세상의 의견이나 경향을 따라가지 말고,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따라가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따라가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따라가는 신앙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이며, 올바르고 참되고 건강한 신앙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기독교는 신비와 초월이 있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신비와 초월의 종교라고 말하지 않고, 계시의 종교, 말씀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신비와 초월을 목적하면 우리 모두는 사탄의 깊은 것에 빠지게 되고, 신앙의 정도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오직 우리의 신앙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닮아가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매일의 삶속에서 다양한 순간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가 되고, 원칙이 되고, 방법이 되는 신앙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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