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계2:18-29절 요한계시록 강해21
제목 : 회개하지 않는 이유!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용두사미(龍頭蛇尾)” 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용두사미라는 말은 말 그대로, 머리는 용의 머리이지만, 꼬리는 뱀이라는 말입니다. 즉, 처음은 대단하고 화려하지만, 나중으로 갈수록 볼품없고 형편없어지는 모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용두사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증증일상(蒸蒸日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날 수록 좋아진다는 뜻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갈수록 좋아진다는 칭찬을 받은 두아디라교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도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처럼, 갈수록 신앙이 좋아짐으로 칭찬받는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반대로,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이 받은 책망이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 여러분 자신을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많다.
오늘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교회는, 소아시아의 4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입니다. 먼저, 두아디라가 어떤 지역인가를 확인해보도록 합니다. 두아디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바울의 동역자이며, 유럽최초의 교회인 빌립보교회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헌신을 했던, 자주장사(자주색 옷감이나 천을 파는 사람) 루디아의 고향입니다.(행16:14절) 따라서 두아디라 지역은 천막, 옷감, 염료와 같은 상업이 발달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두아디라 지역 안에는 상업을 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유익을 보장해주는 여러개의 조합이 발달해 있었고, 그 조합에 가입해야지만, 상거래를 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반대로, 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상거래를 할수 없게 되고, 먹고 살 대책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조합들이 우상숭배와 밀접한 관계속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조합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상숭배에 동참해야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은 많은 어려움을 격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첫 번째 묵상할 것은, 두아디아교회와 성도들이 받은 “칭찬이 무엇인가?” 입니다. 무엇일까요? 19절을 보면,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입니다. 즉, 사업이 많았습니다. 물론, 세상적인 사업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업인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대략적으로 교회에서 대외적으로하는, 구제사업, 전도사업, 선교사업..., 등과 같은 일들을 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은 사랑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사랑은 삶의 원리이고, 삶의 방법이고, 삶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라디라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이 사랑이 많았다는 것은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바로 다음에 나오는 ‘섬김’이라는 단어를 통해 알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랑은 반드시 섬김으로 나타나고 증명된다는 것입니다. 요13:1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요13:4-5절에 보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랑은 섬김(종이 되어주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을 반드시 섬김으로 나타나고 증명되어야 합니다. 섬김이 없는 사랑은 말뿐인 사랑이거나, 가짜 사랑입니다. 참된 사랑은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섬김은 무엇입니까?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뭘 해주는 겁니까? 단지 그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섬김은 일의 개념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의 개념입니다. 즉, 섬김이란 나를 상대방보다 낮은 자라고 여기는 인식의 문제입니다. 반대로, 내가 상대방 보다 더 높고, 잘나서 뭐 해준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섬김이 아닙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라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참고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역시, 예배(섬김)드림으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에게는 사랑이 많았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음을 갖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에게 ‘인내’가 있었음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마치 사랑이 섬김으로 증명되었듯, 믿음은 인내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욥은 성경이 말하는 가장 믿음 좋은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욥을 대표하는 말은 무엇일까요? 바로 인내입니다. 약5:11절을 보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그렇습니다. 믿음은 인내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내 할 줄 아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고, 인내 할 줄 아는 분량이 믿음의 분량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인내할 줄 모른다면 믿음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의 이유로 가난했지만, 구제하는 일과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일, 그리고 믿음으로 인내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바로 이점을 칭찬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과연 여러분은 구제하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최근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보신적 있습니까? 혹시 내 주변에는 어려운 사람이 없어서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럼에 얘기하십시오! 얼마든지 구제할 수 있는 분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또,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업을 하고 계십니까? 또, 여러분은 사랑이 많으십니까? 여러분은 서로를 사랑하고 계십니까? 섬기고 계십니까? 자신을 낮추고 계십니까? 또, 여러분의 믿음은 견고하십니까?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어떤 어려움들을 만나든 잘 인내하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 모두가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처럼, 구제와 사랑과 믿음으로 칭찬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이 칭찬을 받는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구제와 사랑과 신앙의 행위가 갈수록 좋아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19절을 보면,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의 경우는 갈수록 나뻐지는 것, 즉, 용두사미가 되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초지일관, 또는 시종일관입니다. 우리 자신만봐도 이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무슨 일이든, 갈수록 좋아지는 것보다 갈수록 나뻐지는게 휠씬 더 많습니다. 예를들면, 예배의 자세, 말씀에 대한 사모함, 기도의 열심, 봉사의 순수한 마음, 순종의 모습...., 이런 것들이 용두사미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신앙의 모습들이 갈수록 좋아지는 사람 보셨습니까?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은 이런 신앙의 행위들이 갈수록 증증일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신앙과 믿음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갈수록 나뻐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일까요? 많아져야 할 것은 더 많아지고, 적어져야 할 것이 적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많아져야 합니까? 무엇보다 사랑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 기도하는 것, 섬기는 것, 구제하는 것..., 등이 많아져야 하고, 깊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적어져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죄입니다. 죄는 적어져야 합니다. 그 외에도 미움이 적어져야 하고, 교만이 적어져야 하고, 탐심이 적어져야 하고, 이기심도 적어져야 하고, 실언이 적어져야 하고..., 이처럼 적어져야 할 것이 적어지고(용두사미), 많아져야 할 것이 많아져야(증증일상) 합니다. 이게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처럼, 신앙의 모습이 용두사미가 아닌, 증증일상함으로 칭찬받는 여러분 모두가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2.회개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들이 묵상할 것은,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이 무엇을 책망받았는가? 입니다. 무엇을 책망 받았을까요? 먼저, 20절을 보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했다” 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즉, 이세벨이라는 여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은 누구일까요? 우리가 처음에 두아디라 지역의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두아디라는 상업 중심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상업을 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유익을 보장해주는 노동조합이 매우 발달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람들은 많은 특권을 얻지만, 그곳에 가입하지 못하게 되면 상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지역의 노동조합에 가입을 하려면, 우상숭배(특별히 음행)에 참여 해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은 매우 큰 고민과 신앙의 갈등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고민은 노동조합에 가입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생계의 곤란을 각오하면서까지 가입을 거절해야 할것인가? 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처럼 고민하는 성도들 가운데, 한 여인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그 여인의 이름이 이세벨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벨은 대단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웅변 곧 말에 능한 여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특별한 능력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특별히 이세벨은 노동조합 가입의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들에게 니골라당의 주장과 같이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만 하나님께 있으면 된다, 교회만 빠지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전도하려면 그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던 여인입니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이 유혹에 넘어가 우상숭배에 동참했고, 특별히 성적으로 타락한 행음이라는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코 해서는 안될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상숭배와 음행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가장 치명적인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즉, 자신을 목적한다는 점에서 같은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늘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지금 이 부분을 꾸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꾸중이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회개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기 이전에 먼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 용서를 망설이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롭고 미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은 우상숭배와 행음을 저지르면서도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의 성도들이 회개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비슷하지만 다르게 2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우상숭배와 음행의 문제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은 왜 우상숭배와 음행을 죄라고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죄의 기준이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우상숭배의 자리에 참여하고, 그 순서 중 일부였던 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죄라고 여겨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세벨이라는 자칭 선지자의 가르침 곧, 마음이 중요하다..., 라는 가르침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은 마음이 중요하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우상숭배의 자리에 참여하고, 행음을 저질러도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회개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들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많은 선지자들이 회개하라고 말해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역시 자신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죄가 없다고 여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동일하게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큰 문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 버리지 않으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죄를 인정할 수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살인을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만 기준한다면 살인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거나 회개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미움, 무시, 멸시하는 것을 살인이라고 기준한다면, 살인죄를 지었다고 인정하고 회개하게 될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날마다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죄의 기준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죄의 분명한 기준, 죄의 엄격한 기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죄의 기준입니까? 성경입니다. 더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하나님의 기뻐하심, 서로의 유익이 기준이어야 합니다.(고린도교회의 우상의 문제, 술, 담배의 문제)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이 회개하지 않은 둘째는, ‘자신의 죄가 정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즉,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들을 전도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 이라는 자신의 죄에 대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바로 ‘죄에 대한 정당성’을 가진 점을 가장 강력하게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죄든 정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죄를 정당화 합니다. 예를들면,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어쩔 수 없고, 하와는 뱀의 유혹 때문에 어쩔수 없고..., 등 그러나 정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죄를 거절할수 있는 능력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늘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잖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 역시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이 말을 죄를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분노하는 것, 미워하는 것, 원망하는 것, 나쁘게 말하는 것..., 등을 어쩔수 없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속에서 죄를 정당하게 여기는 것들은 없습니까? 죄를 핑계하는 것은 없습니까? 혹시, 너무 피곤해서 예배안드리는 것은 괜찮지, 먹고 살려면 거짓말도 하고 속이기도 해야하지, 아이들 키우면서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 못하는게 당연한거지, 직장생활하면서 술좀 마시는게 어때, 험담도 좀 할 수 있지, 그런 상황에서는 그럴수도 있지?..., 등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할수 없고, 묵인될수 없고, 핑계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죄는 죄입니다. 죄는 반드시 잘못이고, 회개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이유에서라도 죄를 정당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줄 아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교자로서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좋은 설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식을 충족시키는 말, 위로가 되는 말, 감동을 주는 말..., 물론, 필요합니다. 그러나 설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죄를 지적하고, 죄를 밝혀 내고, 죄를 책망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설교를 원하셔야 하고, 기쁘게 받으셔야 합니다. 그게 설교자인 저를 위한 일이기도 하며, 여러분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죄가 들어나고, 죄로 인한 꾸중을 받고, 회개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불꽃 같은 눈을 가지신 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묵상할 것은, 두아디라 성도들이 왜? 이세벨의 가르침을 용납했고, 왜 죄를 짓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보고 계심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23절에 주님이 우리의‘마음을 보시고, 행위를 보시는 분’이라는 점을 모른 것입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마음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도 보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18절을 보면, ‘그 눈이 불꽃같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우리가 아무도 모르게 행하는 모든 일을, 모든 마음을 보시고, 숨어 있는 생각까지 보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몰라 죄의 유혹에 넘어가고, 죄를 시치미뗀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죄에 쉽게 유혹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의식이 없기 때문(신전의식)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시선에 대한 의식만 있어도 쉽게 죄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주인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얼마든지 핑계할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를들면, 주인의 명령이니까?, 불이익을 당할수도 있을테니까?..., 그러나 요셉은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늘 하나님의 시선을(불꽃같은 눈)을 의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쉽게 죄에 유혹에 넘어가지고, 죄를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런 주님의 시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하는 자인줄 알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임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이세벨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침상에 던질 터이요, 큰 환난 가운데 던질’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극심한 고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지킨 사람들에게는 26절에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또, 28절에 ‘새벽별을 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즉, 권세와 승리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주님의 불꽃같은 눈동자 앞에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과 상을 주실 분이심을 기억함으로 죄는 이기고, 믿음을 굳게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두아디라교회 성도들처럼 주님을 위한 사업(구제), 사랑, 믿음이 갈수록 좋아지고, 그러나 반대로 죄를 날마다 회개함으로 죄는 갈수록 줄어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의 시선과 심판을 인식하며 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