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계2:12-17절 요한계시록강해20
제목 : 더 적극적인 신앙의 목표!
들어가는 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수비만 하는 축구팀과 공격만 하는 축구팀이 경기를 한다면, 과연 어느 팀이 이길까요? 공격만 하는 팀이 이깁니다. 공격만 하는 팀은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공격을 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수비만 하는 팀은 가장 좋은 결과는 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이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격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비만하는 팀과 공격만 하는 팀이 경기한다면 공격만 하는 팀이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극적인 자세로는 경기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또,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분명한 목표, 치밀한 계획,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 원만한 대인관계, 약속시간을 잘 지키고..., 그렇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릅니다. 그런데 특별히 성공한 사람들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은 모든 일에 대단히 적극적인 자세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극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은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진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소아시아의 3교회를 향해서 더 적극적인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3교회의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확인하고, 또한 나의 신앙의 자세를 점검하고,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진리를 지킨 교회들
우리는 이미 소아시아의 3교회인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버가모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3교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3교회가 이단의 교훈을 막아냈다는 점입니다. 먼저, 에베소교회를 보시면, 2절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거짓 가르침, 이단의 교훈을 잘 막아냈습니다. 그 점을 주님은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또, 서머나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서머나교회에 보낸 편지 중에는 이단의 교훈을 막아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9절을 보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이미 이단의 교훈을 막아냈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서머나교회가 환난과 궁핍을 당한 것은, 그들이 진리를 거스리는, 진리에 위배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리를 거스리는 것들을 용납했다면 그들에게는 환난과 궁핍이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서머나교회 역시 이단의 교훈을 막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점을 주님이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버가모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3절을 보면,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풍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고 말씀합니다. 즉, 버가모교회는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붙잡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믿음을 지켰다고 말합니다. 즉,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거짓 가르침을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믿음의 근간인 진리를 지켰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처럼 버가모교회 역시 거짓 가르침, 이단의 교훈을 잘 막아냈습니다. 이 점을 주님은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이미 살펴본 소아시아의 3교회는 모두가 거짓 가르침과 이단의 교훈을 잘 막아냈습니다. 물론, 버가모교회의 경우에는 성도 개개인 중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먹고사는 어려움의 문제로 인해서 거짓과 이단의 교훈에 넘어간 자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교회는 거짓과 이단의 교훈에 용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아시아 3교회가 신앙고백을 지키고, 진리를 지키는 것은 오늘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가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말이 어디에 있냐고요? 마16:18절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반석은 무엇일까요? 그 앞 부분에서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입니다. 그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당한 신앙고백위에 세워진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정당한 신앙고백이 없거나 부정하거나 변질되었다면, 더 이상 그 교회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또, 딤전3:15절을 보면, 바울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정의를 합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무슨 말입니까? 교회는 진리를 견고하게 세우고, 진리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고 그 진리를 세상에 알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무와 책임으로 삼는 곳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신앙고백을 지키고, 진리를 지키고,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선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힘(세상적인 힘이 아니라, 교회다움의 힘, 거룩함이라는 힘 – 세상적인 힘은 더 강해지고 있습니다. 정말 안될 일입니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고백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예수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가 붙들어야 할 진리를 놓치고, 진리가 아닌 것을 붙잡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진리를 붙들고, 전하고, 가르치는 것보다는 성공하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랑하는교회는 어떨까요? 신앙고백이 견고한가요? 진리를 붙잡고,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로 교훈 삼고 있나요? 더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오직 예수라는 신앙고백이 견고하십니까? 배운 진리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혹시 버가모교회처럼 교회는 신앙고백과 진리를 지키지만, 성도 개인된 여러분은 신앙고백을 잃어버리고, 진리를 놓치고, 진리 아닌 것을 삶의 방법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바랍니다. 우리 사랑하는교회가 언제든지 신앙고백과 진리를 붙잡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 바라는 것은, 성도 각 개인인 여러분 각자도 삶속에서 오직 예수라는 신앙고백을 붙잡고, 진리를 따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런 교회, 그런 성도로 우리 모두가 주님께 칭찬받기를 바랍니다.
2.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소아시아의 3교회가 거짓가르침과 이단의 교훈을 거절하고 막아냈고, 그러한 점을 주님께서 칭찬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소아시아 3교회를 향한 공통된 주님의 꾸중과 책망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들이 거짓 가르침과 이단의 교훈을 거절하고 막아내는 것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할 도리를 다했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4절을 보면, 주님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꾸중하고 책망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무엇입니까?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1차적으로는 거짓과 이단의 가르침을 분별하고, 들어내고, 거절하고 막아내는 가운데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로,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신천지의 침투를 경계합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천지를 경계하다 보니, 교회에 새로 나오는 분들을 ‘혹시 신천지는 아닌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온 건 아닌가?’라는 의심과 경계심을 가지고 대하게 됩니다. 사랑이 식어가고 있습니다. 에베소교회가 이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의미는 2차적으로, 진리를 막아냈지만, 진리는 지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사랑은 결코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진리가 있는곳에는 사랑이 있고,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진리와 사랑은 항상 함께 합니다. 조금 더 강하게 말하면, 진리와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래서 고전13:6절에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 또, 요이1:3절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고 말씀한 것입니다. 또, 버가모교회를 향한 꾸중과 책망은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면,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무슨 말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거짓가르침과 이단의 교훈 앞에서 신앙고백과 진리는 지켰지만, 신앙고백대로, 진리를 따라 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고 일부 성도들에 해당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서머나교회에 보낸 편지속에는 이와같은 꾸중을 발견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러한 성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완벽한 교회, 완벽한 성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아시아 3교회를 향한 주님의 꾸중과 책망은 교회안에서 거짓과 이단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고, 그 결과 진리는 지켰지만, 진리를 따라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의 신앙의 자세는 교회안에 거짓과 이단의 교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만 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꾸중이고 책망인 것입니다. 당연히 꾸중과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과 진리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고백대로 살고, 진리를 더 채우고, 진를 더욱 따라 살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도 이러한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꾸중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를들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요구한 절기를 지키는 것, 특별히 성전을 지키는 것, 하나님을 버리지 않는 것만 생각한 사람들입니다. 대단히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절기를 왜 지키라고 하시고, 성전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며, 살아내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신앙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또, 신약성경의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주변을 맴돌면서, 예수님의 말과 행동을 비난하던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우리들도 이들처럼 누군가의 주변을 맴돌며 누군가의 말과 행동을 비난하는 일을 하곤 합니다. 참 나쁜 일이며, 신자답지 못한 일입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비난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의 실력을 증명하고 과시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종 종 누군가를 비난할 때가 있습니다. 그 역시, 자신의 신앙의 실력을 증명하고 과시하기 위한 수단일 때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비난하는 일을 하면 안됩니다. 도리어 품어주고, 좋게 봐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한 내용들은 무엇입니까? 예를들면, 마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으라는 말을 들은 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또, 마9장에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는 것을 보고,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갔다’고 비난했을 했고, 또, 마12장을 보면,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먹는 것을 보고,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또, 마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병고치는 것을 보며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나타나는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 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그들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안하는 것을 신앙의 최고 목표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은 대단히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신앙이 고작 남을 비판해서 자신을 증명하는 정도의 미숙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정말 신자로서 최소한의 신앙생활만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들면, 술 안먹고, 담배 안피우고, 욕 안하고, 교회가 마음에 안들어도 안나가고, 도둑질 안하고, 간음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고, 못된 짓 안하고..., 또, 주일오전예배, 식사기도, 교회에서 시키는 것만 하고, 안 할수 없는 것만 하고, 마지 못해 하고..., 등과 같이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시대의 이스라엘이고, 이시대의 바리새인입니다. 더 이상 이렇게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지면 안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 점은 엡4장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22절을 보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뭘 더 하랍니까? 24절에 ‘새 사람을 입으라’ 계속해서 이 부분을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계십니다. 25절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 28절 도둑질하지 말고 가난한자에게 구제하라, 29절 더러운 말을 하지 말고 덕 세우는 말을 하라, 31-32절 악독을 버리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넘어서 더 적극적인 자세를 가질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일에 적극적인 신자가 되십시오! 특별히 신앙생활속에 적극적인 신자가 됩시오! 예배에 적극(미리 나와 기도로 준비, 찬양도 크게, 설교도 집중), 묵상에 적극, 기도에 적극, 헌금생활에 적극, 봉사와 헌신에 적극, 섬김에 적극, 감사에 적극..., 등 특별히 여러분이 더 더욱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일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여러분이 더 더욱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는 일, 여러분의 인격과 성품과 삶의 내용 속에 하나님을 채워가는 일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하라 하지말라 하시는 순종을 요구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들에게 다양한 순종을 요구할까요? 그것은, 단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방법으로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복을 받기 위해서 제시된 것도 아닙니다. 또는,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분이고 우리는 따라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정확히 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순종을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 안에, 우리의 삶에 하나님을 채우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엡3:19절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이러한 이유보다 크고 중요한 순종의 이유는 없습니다.
3.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가지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뭘 안하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최소한의 것을 하는 소극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들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것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에 해야 할 것, 곧 선을 행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하셨습니다. 그 결과 안식일에 온갖 병든자들이 고침을 받는, 놀라운 하나님의 일들을 경험하고 은혜를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너무나도 소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하면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을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지금 보다 더 크고 높은 신앙의 목표를 가지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25점이 목표인 학생과 100점이 목표인 학생 중에 누가 더 공부하는 자세가 적극적이겠습니까? 당연한 더 높은 점수를 목표한 학생일 것입니다. 25점이 목표인 학생은 공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답지에 1,2,3,4 중 하나의 답만 모두 표기 하면 25점은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보다 더 크고 높은 신앙의 목표를 세우십시오! 그냥 또 넘어가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십시오! 여러분의 신앙의 자세가 적극적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주님은 뭔가를 안하는, 그리고 최소한만 하는 소극적 신앙의 자세를 가진 교회와 성도들을 꾸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소극적인 신앙의 자세가 아닌, 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보다 더 크고 높은 신앙의 목표를 갖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순종을 통해서 내안에 그리고 내 삶에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하나님을 채우는 일에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속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신앙의 자세를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