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계2:12-17절 요한계시록강해19
제목 : 신자의 역할과 책임!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지킬박사와 하이드’ 라는 책을 아실 겁니다. 이 책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단편 소설로 인간의 이중성, 또는 이중인격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킬박사는 인간의 몸에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의 본능(인격)이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선과 악의 인격을 분리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실험 끝에 약물을 하나 만들었고, 선과 악 곧 2개의 인격을 분리하는데 성공을 합니다. 그리고 낮에는 착하고 선한 지킬박사로 살고, 밤이 되면, 약물을 먹고 악한 인격만 가진 하이드가 되어, 돌아다니며 온갖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지킬박사는 이렇게 철저히 이중생활을 한 것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주님께서 버가모교회 성도들에게 이중생활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역할과 책임을 확인하는 시간 갖도록 합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신자의 이중생활
우리는 지난 시간 버가모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어진 칭찬과 책망이 무엇이었는가를 확인해보았습니다. 먼저, 버가모교회의 칭찬은 무엇이었습니까? 2가지였습니다. 13절을 보면, 첫째는, 예수의 이름을 굳게 잡았음에 대한 칭찬이었고, 둘째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칭찬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신앙적인 선택을 칭찬 받은 것입니다. 물론, 버가모교회 성도들이 신앙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버가모지역에는 다양한 신들이 있었고, 그 다양한 신들을 존중했으며, 그 다양한 신들을 함께 숭배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해서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고, 실제로, 안디바라는 성도는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코 쉬운 선택은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선택을 주님은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버가모교회를 향한 책망은 무엇입니까? 14-15절을 보면,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물론,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은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발람, 니골라당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세상과의 타협입니다. 물론, 이 말은 신앙과 믿음을 버렸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세상적인 것들 곧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도 가지고자 했다는 말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하나님도 소유하고 세상의 것도 소유하기를 원했고, 신앙의 재미도 보고 세상의 재미도 보고자 타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왜 타협일까요? 그 이유는 신앙과 세상의 것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 세상을 공존시키려고 중도안인 타협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타협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히 버가모교회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믿음과 신앙을 지킨 것으로 인해서 칭찬을 받았는데, 그들이 책망받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자신이 원하는 것들 곧 세상의 것들을 얻기 위해서 세상과 타협했다는 것입니다. 모순처럼 보여집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가장 간단히 이해하는 방법은 있습니다. 버가모교회 성도들 가운데에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믿음과 신앙을 지키고자 한 성도들이 있었지만, 반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세상과 신앙의 타협을 한 성도들도 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는 표현도 있습니다. 14절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5절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16절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등의 표현을 보면, 버가모교회 성도들 가운데 신앙의 타협을 하던 자들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신앙과 믿음을 지킨 성도도 있었고, 신앙의 타협을 한 성도들도 있었다고 이해해도 절대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안에서 이런 성도, 저런 성도가 있었다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칭찬과 책망이 모두 ‘네가(13절) 네게(14절)’ 로 지칭되는 버가모교회 전체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칭찬 받은 성도와 책망 받을 성도로 나뉘어서 칭찬과 책망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버가모교회를 칭찬하고, 버가모교회를 책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선,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각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즉, 나만 잘하고 나만 바르고 그래서 나만 칭찬받으면 되는 그런 관계게 아니라, 함께 칭찬 받고, 함께 책망 받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평가받는 한 몸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버가모교회를 보십시오! 모든 성도가 다 칭찬받을 만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를 칭찬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책망받을 만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를 책망합니다. 신앙생활은 개인전만이 아닌 단체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혼자만 잘하는 것은 진정 잘하는게 아니라 함께 잘하는 것이 진정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전은 잘하는데 단체전을 너무나 잘 못합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2인3각 경기와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난 혼자 잘한다고 잘하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은 함께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의 특징은 서로를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이끌어 주고, 무엇보다 서로의 짐(못남)을 짊어져 주는 일(감당)을 잘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함께 칭찬받고, 함께 책망받는 한 몸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 의식이 강한 교회가 참 교회다운 교회이며 좋은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교회가 이러한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버가모교회를 향한 칭찬과 책망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버가모교회 성도들의 이중생활을 지적하기 위한 말씀인 것 입니다. 물론, 버가모교회 성도 모두가 이중생활을 했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버가모교회안에는 안디바와 같은 참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버가모교회 성도들에게 스며들고 있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자들의 이중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예를들면, 교회안에서는 세상에 하나님 말고 다른 신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라고 말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여러 신전을 찾아가고, 그 신전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버가모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이중생활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신자들의 이중생활의 문제는 버가모교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계시록에서 소개하고 있는 7교회 모두 이러한 신자들의 이중생활이 문제화 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신자들의 이중생활은 이미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속에서도 만연해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분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하지만, 실상 그들은 우상숭배를 했고, 이방의 강대국을 의지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이중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떨까요? 혹시, 신자로서 이중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안에서는, 또는 교인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는 신자로 살고, 교회 밖에서는 거의 불신자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를들어 봅시다. 교회안에서는 참 겸손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는 너무 교만하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교회안에서는 거룩합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는 조금도 거룩하지 않고, 도리어 부정한 모습으로 살지는 않습니까? 교회안에서는 이해심이 깊습니다. 그런데 교회 밖에서는 이해심이 전혀 발휘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안에서는 옳음과 정의를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 세상에서는 불법, 편법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교회안에서는 양보를 잘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는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교회안에서는 따듯하고 위로의 말을 잘합니다. 그러나 교회 밖에서는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지는 않습니까? 교회안에서는 사랑을 강조하지만 교회 밖에는 미움을 나타내며 살지는 않습니까? 이 밖에도 교회안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다른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이중생활을 중단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한 주님의 메시지입니다. 신자로서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이중생활을 중단하십시오!
2.신자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신자로서의 이중생활을 경고하고 중단을 촉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로서 이중생활을 하게 되면, 신자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와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내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평생 잊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이 점을 2가지 본문을 통해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롬12장을 봅시다.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러분! 롬12:1절을 ‘그러므로’ 라고 시작을 합니다. 이 말은 앞에 있는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롬11장은 어떤 이야기입니까? 이스라엘의 구원과 이방인들에게 주어진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 신자로 부름받은 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신자된 자들에게 롬12:1-2절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롬12:1-2절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늘 분별하라는 것이고, 그 뜻에 따라서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가라’ 는 것입니다. 또, 이 점을 엡4:22-24절에서 더 분명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너희는’ 누구입니까? 구원받은 자이며, 은혜 받은 자들입니다. 신자로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 은혜받은 자의 의무와 책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들이 세상에서 이중생활을 한다면,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해 가는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구원받은 자로서, 은혜받은 자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자신을 고쳐나가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성장해 가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격과 성품과 삶을 더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자로의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신자로서의 책임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주어진 두 번 책임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종 종 신자들 가운데에서는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신자들을 불신자들이 사는 세상에 살게 하시고, 불신자들이 격는 일들을 격게 하실까?’ 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 삼기 위함입니다.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출19:6절을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거룩한 백성 삼으신 이유는 이방인 나라를 하나님께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벧전2:9절을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라고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시고 신자 삼으신 이유 역시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산상수훈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요’ 라고 표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과연 여러분은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이 무슨 말인 것 같습니까? 간단히 말하면, 없어서는 안될 사람, 꼭 필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한다면,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삶의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거룩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중생활을 한다면, 과연 이러한 신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구원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여러 가지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죄와 사망에서 건저냄을 받음, 하나님 자녀로의 신분의 변화, 그리스도의 몸이 됨, 사역으로의 부르심..., 특별히 오늘 주제와 연관해서 말한다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도록 부름받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 여러분으로 인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선한 영향력이 생겨나고 있습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묻습니다. 지난 한주 동안 여러분이 있음으로 위로받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힘과 용기를 얻은 사람은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웃음을 되찾은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된 사람은 있습니까? 여러분을 고마운 사람, 은인으로 삼은 사람은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덕을 본 사람은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가정이 회복된 사람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죄를 중단한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신자로서 빛과 소금이고, 역할을 잘 감당한 것입니다. 이제 반대로 물어 봅니다. 혹시, 여러분이 있음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낙심한 사람은 없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불협화음이 생기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다툼이 생기고, 험담이 생기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술자리가 생겨지고, 도박의 자리가 생겨지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있음으로 누군가 해를 입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빛과 소금과 거리가 먼 하나님께 꾸중 들을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신자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과 같은 곳에서 살고, 일하게 하신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그들 곁에서 소금과 빛으로 선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이라는 선한영향력을 발휘하는 삶에 무관심하고, 오로지 더 많은 복받는 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3.신자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하려면!
그렇다면, 우리들이 세상에서 신자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다른 기준으로 살아야 합니다. 먼저, 마5장의 빛과 소금의 비유 본문에서는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착한 행실을 가지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착한행실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착하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윤리적 도덕적 착함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착함은 쉽게 말하면, 세상 사람들 보다 더 나은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기준의 삶, 더 높고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예를들면,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살인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살인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다르고, 높고, 엄격한 기준을 가지게 될 때, 우리들은 세상에서 비로써 소금이 되고, 빛이 될수 있으며,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신자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 삼아야 세상 사람들과 다르고 높고 엄격한 기준을 갖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정확무오하며, 살있는 말씀인 성경을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삼으면 됩니다. 또, 하나님의 기쁨, 하나님의 원하심을 기준으로 삼으로면 됩니다.
둘째로, 각오와 다짐이 필요합니다. 더 정확히 말을 하면, 죽을 것까지도 각오해야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必死卽生 必生卽死 (필사즉생 필생즉사) 싸움에 있어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것이고, 살고자 하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입니다. 그리고 이 말로 인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대장 예수님은 로마의 권세보다 더 강한 권세를 가지신 분이십니다. 12절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최고의 권세자이신 주님앞에 죽음까지 각오와 다짐을 한다면 여러분을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여러분은 신자로서 반드시 감당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하고 계십니까? 이것을 위해서 더 이상 신자로서 이중생활은 안됩니다. 이제는 신자답게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완성하고, 세상의 소금과 빛답게 살아가기를 각오하고 다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