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계2:12-17절 요한계시록 강해18
제목 : 선택과 타협!
들어가는 말
아주 옛날 어느 마을에 마늘 도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이 도둑이 마늘을 훔치다가 붙잡혀 사또에게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사또는 마늘도둑에게 3가지 벌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생마늘 100개를 먹는 것이고, 둘째는, 곤장 50대를 맞는 것이고, 셋째는, 금1냥을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늘도둑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생마늘 100개를 먹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 둘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개를 먹고 나니 더 이상 못먹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또에게 곤장을 맞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곤장을 20대 맞고나니 더 이상 맞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또에게 금1냥을 벌금으로 내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선택의 중요성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마늘도둑이 처음부터 선택을 잘했더라면, 생마늘 20개도 안먹었을 것이고, 곤장 20대도 안맞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을 살면서 선택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신자다울 수도 있고, 신자답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선택을 함으로 칭찬을 받은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을 우리들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도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받으실 만한 선택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믿음을 저버리지 않음 - 선택
먼저, 버가모교회가 있었던 지역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버가모지역은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정도에 위치한 지역으로, 주변 지역보다 300m가 높은 지대의 도시였습니다. 특별히 이 지역은, 양피지와 파피루스 곧 질 좋은 종이를 생산하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따라서, 이곳은 학문(20만권 이상 있는 도서관이 있었다)과 의술이 대단히 발단한 지역으로, 헬라문화가 가장 꽃피웠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은 13절을 보면, ‘사탄의 권좌’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공격이 대단히 심각했던 곳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버가모 지역은 소아시아지역을 관리하는 로마군대의 집결지였고, 특별히 이 지역에는 대단히 많은 신전들이 있었기 때문이니다. 예를들면, 제우스 신전, 아테네 신전, 디오니수스 신전, 아스클레피우스 신전(뱀신으로서 치유의 신으로 여겨서 세계 여러 지역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버가모 지역에는 로마황제 숭배를 위한 신전도 2개나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버가모 지역의 교회와 신자들은 대단한 환난과 박해를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버가모교회와 신자들은 매일 매일의 삶이 죽느냐? 사느냐? 의 생사의 기로에 서는 삶을 살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첫 번째, 묵상할 것은, “버가모교회를 향한 칭찬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입니다. 무엇을 칭찬받았을까요? 2가지입니다. 첫째는, 13절을 보면,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라고 말을 합니다. 이름을 굳게 잡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아마도 행4:12절에 나오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니라’는 말씀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유일한 구원론 신앙을 붙잡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종교다원주의를 아시지요? 간단히 말하면, 종교가 다르고, 각 종교에서 말하는 신도 다르고, 각 종교가 말하는 사후세계의 표현과 모습은 다르지만, 결국 모두가 동일한 천국(다른 세상)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르게 말을 하면, 북한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하나만 있지 않습니다. 13개 정도의 길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각기 길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여러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의 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각 자의 종교에서 열심히 해서 천국에서 만나자고 말을 합니다. 신앙과 종교가 없는 사람들이 볼때에는 참 아량도 넓고 멋져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 종교인이 모인 자리에서, 다 천국에 갈거라고 말하고 연합 하는 자리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시 버가모 지역에는 여러 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들을 존중하고 함께 숭배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그 버가모 교회와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이라고 말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칭찬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버가모교회와 성도들이 받은 두 번째 칭찬은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입니다. 그렇습니다. 버가모 성도들은 생명과 평안한 삶을 위해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신앙을 위해 생명을 버리고, 평안한 삶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당하는 안디바를 보면서도 믿음과 신앙을 지켰습니다. 즉, 죽느냐 사는냐의 문제에서 그들은 믿음과 신앙을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칭찬받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버가모 성도들은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선택,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을 칭찬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버가모성도들의 이런 선택은 정말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여러분의 목에 총을 겨누고, 생명과 믿음중 하나만을 선택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조금 더 무게감을 실어서 말해봅시다. 누군가가 여러분의 자녀, 손주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겁에 질린 자식과 손주가 울고 있다면, 그 상황에서 믿음과 생명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망설임이 없이 믿음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너무 심한 설정입니까? 그럼 여러분의 자녀와 손주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믿음과 생명 가운데 무엇을 선택하라고 말하겠습니까? 이 정도만 생각해도 버가모교회 성도들의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선택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칭찬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보면, 안디바라는 인물을 소개합니다. 안디바가 누구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주님께 ‘충성된 증인’이었다고 인정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즉, 믿음을 위해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 순교자였다는 것입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안디바가 로마군인에게 끌려가 로마황제 상에 절을 하고 분향할 것을 권유받았고,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일것이라고 위협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디바는 그 자리에서 믿음을 지키고 순교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에 달구어진 큰 솥안에 던져저 죽었다고 합니다. 이럴 정도로 버가모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신앙을 선택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아주 중요한 한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선택이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에녹을 보십시오! 그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또, 노아를 보십시오! 그는 사람들에게 손가락과 조롱을 당하면서도 방주를 만드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삶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 모세를 보십시오! 애굽의 왕자로서의 자리를 포기하고 당시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일을 선택했습니다. 모세가 노예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이 될 것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비록 노예민족이지만 하나님의 선민이고 백성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역시, 그의 믿음이 선택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오늘 이 예배의 자리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은 예배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선택을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선택은 믿음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선택이 ‘믿음의 수준’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가인과 아벨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도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창4장을 보면, 가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죄 짓는 삶을 선택했고, 아벨은 의롭고 선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 역시 선택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 또, 야곱과 에서를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 역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소망했고, 에서는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팥죽을 선택했습니다. 이 역시 선택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된 우리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의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신자들에게 선택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 셋째로, 신앙의 올바른 선택은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킵니다. 믿음과 신앙은 신앙의 연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올바른 신앙적 선택이 쌓여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과 신앙의 선택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 칭찬 받을 만한 선택, 신앙을 증명하고 성장 시킬만한 선택을 잘 할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작은 것부터 믿음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들면, 우리들이 덧샘, 뺄셈, 곱하기 나누기를 못하면, 분수, 방정식, 미분, 적분, 사인, 코사인, 탄젠트, 함수, 확률..., 등을 풀어낼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것부터 믿음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예를들면, TV보다 성경을, 인간적 방법보다 기도를, 거짓된 삶을 살것인가? 정직한 삶을 살것인가에서 정직한 삶을 선택하는 것, 미워할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에서 용서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 주일을 지킬 것인가? 놀러갈 것인가? 에서 주일을 지키는 것을 지키는 삶을 선택하는 것, 섬기는 삶을 살것인가? 섬김받는 삶을 살것인가?에서 섬기는 삶을 선택하는 것...., 이런 작은것부터 믿음으로 선택할 때, 정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에서도 담대히 믿음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2.발람과 니골라당을 따름 - 타협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묵상할 것은, “버가모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책망이 무엇인가?”입니다. 무엇입니까? 14절을 보면,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발람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먼저, 발람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였습니다. 특별히 그는 메소포다미아 지역 곧 이방선지자였습니다. 그는 모압왕 발락에게 돈을 받기로 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입을 막으셨고, 저주가 아니라 축복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자 발람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곤경에 처하도록 하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즉, 배고픔과 성적인 욕망을 자극하여 모압의 우상숭배에 참여하도록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행음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그 결과 2만4000명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결국, 발람의 교훈은, 욕망을 충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버가모교회 성도들 역시, 자신의 욕망의 충족을 위해서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이 점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15절을 보면,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니골라당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이들은 영지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자들입니다. 영지주의란?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라는 이원론적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신앙의 영역에서는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라는 사상을 갖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고, 신앙과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육체와 육체로 행하는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믿음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육체로 무슨 일을 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구원파라는 이단의 교리와 비슷합니다. 즉, 이미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지어도 문제가 되지 않고, 조금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 성도들 가운데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고, 방종의 삶을 살던 성도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과의 타협입니다. 즉, 하나님도 갖고, 세상의 것도 갖고, 신앙의 재미도 보고, 세상의 재미도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절대로 하나님도 갖고, 세상의 것도 갖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즉, ‘한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것에 관심을 갖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버가모교회가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고, 세상과 타협했던 이유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죽음이 싫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이 불이익을 당하기 싫고, 자신이 갖고자 하는 것을 잃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의 결과 우상을 숭배하고, 방종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버가모교회 성도들을 향해 책망입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좀 혼동스러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버가모교회를 향한 칭찬은 죽음을 각오하고 믿음과 신앙을 선택한 것인데, 버가모교회를 향한 꾸중은 죽음과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 타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좀 앞뒤가 안맞아 보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간에 설명하겠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버가모교회 성도들처럼,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또는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께도 재미보고, 세상에서도 재미보고 싶은 두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두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수 없는 것이고, 더나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선택하는 일을 할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신앙의 타협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결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권면 - 회개하라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묵상할 것은, “버가모교회의 성도들에게 주신 마지막 권면이 무엇인가?” 입니다. 무엇입니까?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는 것입니다.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세상과 타협한 일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즉, 주님께서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17절에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터인데’ 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감추었던 만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막의 법궤안에는 3가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십계명의 두돌판, 둘째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셋째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였습니다. 이 만나 항아리는 아무에게나 공개할 수 없는 거룩한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본문의 감추었던 만나는 이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추었던 만나를 준다는 것은 결국, 가장 거룩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증표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의 필요를 채우신 것처럼 회개하는 자의 삶의 필요를 공급하시겠다는 말입니다. 또, 흰 돌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AD1세기에 흰돌은 중요한 역할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첫째로, 법정에서 유, 무죄를 말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즉, 재판장이 흰돌을 꺼내면 무죄, 검정돌을 꺼내면 유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잔치의 초대장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즉, 어떤 잔치에 누군가를 초대할 때 이름이 쓰여진 흰돌을 주었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비록 세상과 타협했지만, 용서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메시야의 잔치에 초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만나와 흰돌은 같은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고, 구원주시고자 하는 자들을 보상하시겠단느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금 주님께서는 버가모교회 성도들에게 회개를 요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전히 두마음을 품고, 세상과 타협하는 우리를 향해서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계신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타협함을 회개하십시다. 여전히 두마음을 품고 있음을 회개하십시다. 그 밖에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회개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무엇입니까? 잘못을 깨달는 것, 잘못을 반성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삶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을 바꾸지 않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회개로부터 신앙의 회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신앙과 믿음이란 단순히 어떤 신앙의 행위나 열심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과 거절 곧 타협하지 않음으로 증명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하가나 바꿀수 없는 영원한 선물을 약속받은 자들입니다. 이 약속을 근거로 세상적 타협을 이기고, 올바른 선택을 하며 칭찬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