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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니골라 당의 행위!(요한계시록 강해11 )
 본문말씀 : 계2:1-7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19.9.18
조회 : 5,850   추천 : 0  
본문 : 계2:1-7절   요한계시록 강해11 
제목 : 니골라 당의 행위!  

  들어가는 말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 또는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는 무엇인가는 끊임없이 존재했습니다. 예를들면, 초대교회 시대에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핍박이라는 외부적인 위협이 있었고, 중세시대에는 세속화, 권력화라는 내부적인 위협이 있었습니다. 이렇듯 기독교 역사 가운데 외부적인 위협과 내부적인 위협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시대, 일제 강점기시대, 한국전쟁 시대에는 외부적인 박해라는 위협이 있었고, 그 후 기독교가 부흥하면서 세속화, 권력화라는 내부적인 위협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에 존재했던 또 다른 위협이 있다면, 그것은 이단들의 위협입니다. 이단들의 위협은 초대교회시대부터 오늘날까지도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말의 날까지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AD1세기 당기 기독교신앙을 위협했던 이단을 소개합니다. 바로 ‘니골라 당’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니골라당의 주장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혹시 우리들의 모습속에서 니골라당의 모습은 없는가를 점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당시 니골라당의 행위
 우리는 지난 시간 주님께서 에베소교회를 향해 무엇을 칭찬하시고 무엇을 꾸중하셨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주님이 에베소교회를 향해 칭찬하신 내용은 무엇입니까? 말뿐이지 않고, 신앙의 행위에 열심히 있었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거짓 가르침, 이단들의 공격으로부터 진리를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다는 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6절에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입니다. 즉, 니골라 당의 거짓과 유혹으로부터 진리를 지켜내는 일을 했다는 점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주님이 꾸중하신 내용은 무엇입니까? 서로에 대한 마땅한 사랑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행위를 만들고, 진리를 지키는 가운데 놓치면 안될 사랑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간단히 말하면, 열심은 가졌지만 사랑은 놓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잘못은 에베소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각 시대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떤 일에든 열심을 내야 마땅 하지만, 결코 사랑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을 하면, 열심보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 안될 것입니다. 

 오늘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이겨낸 ‘니골라 당이라는 이단’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니골라당의 교주는 누구일까요? 니골라라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니골라는 누구일까요? 누구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이 추측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행6장에 언급된 초대교회 7집사 중 한사람이라는 추측입니다. 행6:5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물론, 추측이고 견해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안에 침투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면 교회내에서 어느정도 신임이 있었던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니골라가 그 사람이 맞는지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니골라당의 주장, 또는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입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본문만 봐서는 니골라당이 어떤 주장을 했고, 어떤 것을 가르쳤는지 알수 없습니다. 그런데 ‘버가모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니골라 당을 다시 언급됩니다. 즉, 15절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런데 이 구절 앞 구절인 14절을 보면, 니골라당의 주장과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언급이 나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면서 15절에 ‘이와같이 너희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또, 계2:20절에 나오는 ‘자칭 선지자 이세벨’은 모두 같은 맥락의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발람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 민22-25장의 내용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모압왕 발락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다가옴을 굉장한 두려움과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발락은 당시 유명했던 발람선지자를 초대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발람선지자를 막으셨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4번이나 크게 축복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모압 여인들과 행음을 하게 되고, 그들의 우상인 바알브올까지 숭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진노로 24,000명이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발락의 바람대로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발람선지자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발람은 발락의 요구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저주받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잔치의 자리에 초대하고, 식사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모압여인들과 음행하게 될 것이고 결국 우상숭배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스스로 망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방법을 발락왕에게 알려준 것이고,(민31:8절, 유1:11절) 발람의 말대로 이스라엘은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께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발람은 모압왕 발락왕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거나 저주하는 방식이 아닌, 이스라엘로 하여금 타협하도록 하는 방법,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도록 하는 방법을 교훈한 것입니다. 결국, 발람의 교훈, 또는 니골라당의 행위의 공통점은 세상과의 타협인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신자들의 입장에서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교회와 신자들은 로마로부터(도미티안황제) 대대적인 박해를 당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입니까?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로마황제를 신격화, 그리고 숭배하지 않는 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그 이유로 당시 교회와 신자들은 너무나도 끔찍한 박해를 당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니골라라는 사람이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로마의 권세 사이에서 대립을 조율해서 일신의 안녕을 도모하고 신앙도 놓치지 않으려는 타협안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신자들이 목숨을 지키고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로마황제숭배에 참여했다는 확인서만 받자고 제안을 한 것입니다. 당시 문헌을 보면, 한번만 황제숭배에 참여하면, 황제숭배에 참여했다는 증서를 주고, 더 이상 어떤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니골라라는 사람은 한번만 황제숭배에 참여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니, 굉장히 지혜로운 행동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니골라의 주장에 많은 신자들이 찬성를 했고, 황제숭배에 빠진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버가모, 두아디라..., 등 물론,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황제숭배를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신앙을 위해서 황제숭배를 선택한 일은 옳은 일일까요? 어쩌면 여러분 중에는 의견이 다를분도 있을수 있지만 아닙니다. 옳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당시 신자들은 니골라의 말을 옳게 여겼을까요? 이유는, 그 당시 만연해 있던 헬라사상 때문입니다. 즉, 당시 헬라 사상이란 영지주의를 말합니다. 그러면 영지주의란 무엇입니까? 물질은 악하고 정신은 선하다라는 이원론적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신앙의 영역에서는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라는 사상을 갖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영혼이 중요하고, 신앙과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육체와 육체로 행하는 행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믿음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육체로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황제숭배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니골라당의 행위는 세상과의 타협의 문제인 것이고, 이러한 타협이 가능했던 것은 신앙과 삶을 이원화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니골라당의 교훈인,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교훈인 것입니다. 핵심은 타협이고, 이원화인 것입니다.

  2.오늘날의 니골라 당의 행위
 그렇다면, 니골라 당의 행위가 AD1세기만 문제였을까요?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기독교는 신사참배 거절로 인해서 많은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도 니골라당이 있었습니다. 즉, 안전을 보장 받고, 교회 유지를 보장 받고, 예배를 보장받기 위해서 마음과 신앙만 변질되지 않는다면, 신사참배를 해도 괜찮다, 그리고 신사참배의 종교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신앙과 신사참배를 이원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중에 선동되어 아무렇지 않게 신사참배에 참여한 교회와 신자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물론, 오늘날에도 니골당과 같은 주장을 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단이 바로 ‘구원파’입니다. 이들 역시, AD1세기의 니골라당의 주장과 같이 육체로 행하는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합니다. 즉, 신앙과 삶을 이원화 시킨 것입니다. 즉, 교회에서는 신자, 세상에서는 비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구원파는 오늘날의 니골라당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니골라당의 행위를 하는 것이 구원파만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오늘날 니골라당의 행위가 없는 교회, 니골라당의 행위가 없는 신자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비극은 니골라당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하면, 교회안에서는 훌륭한 신자인데, 교회 밖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타협하는거지요? 이원화인 것이이지요? 이것이 니골라 당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스로와 타협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신앙의 점수를 매기는 방법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100점을 기준할 때, 예배생활 20점, 말씀과 기도생활 20점, 봉사생활 20점, 헌금생활 20점, 교육 및 양육 10점, 전도생활 10점...,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자신의 신앙의 점수를 매기는 기준이 전부 교회안에서의 생활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의 거룩, 사랑, 인격, 성품, 존재의 가치..., 등의 점수 배점이 없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신앙의 점수는 80점 이상 (우) 나옵니다. 그러니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착각은 구약시대 신자들과 신약시대 신자들도 모두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구약성경을 보면, 수없이 많은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 백성답지 못하다는 꾸중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부정했습니다.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 하나님 백성다웠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하나님 백성 답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한거 아닙니까?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꾸중을 부정했고, 자신들을 향해서 하나님 백성 답지 못하고 꾸중하는 선지자들을 거짓선지자로 여겼고, 그들을 학대했습니다. 그렇다면, 분명히 하나님 백성답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꾸중을 부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렘7:1절 이하에 정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여로와의 집 문에 서서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백성다우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내 쫒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자신들이 하나님 백성답다는 것을 자신들이 지은 성전이 증명한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전을 지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명이고, 하나님께 대한 열심히 있다는 증명이고, 신앙의 증명이고, 하나님 백성다움의 증명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계속해서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백성답지 못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하나님 백성 다움이라는 점수 매길 때, 이스라엘은 무엇을 기준했습니까? 성전을 지은 것, 성전에서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점수를 매길 때 무엇을 기준으로 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존재, 인격, 성품, 삶의 내용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기준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성전을 지었다는 것을 신앙의 증명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래서 훗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성전을 헐라’ 내가 다시 짓겠다입니다. 결국, 구약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타협을 한 것, 신앙과 삶을 이원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니골라당입니다. 이번에는 신약에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2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꾸중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야 말로, 당시 신앙이 가장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고 자부한 기준과 근거는 무엇일까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즉, 남들보다 더한 신앙의 열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꾸중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즉, 그들의 존재, 인격, 성품, 삶의 내용이 하나님을 닮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신들은 신앙이 좋다고 착각한 것은, 점수를 매기를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도 스스로 타협을 한 것입니다. 신앙과 삶의 이원화입니다. 이것이 또한 니골라당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이 니골라 당의 행위를 가진자는 아닙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내용이 교회를 넘어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니골라 당의 일원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교회안에서의 모습과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다르거나, 신앙과 삶이 다르다면 그게 바로 니골라당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앙의 점수를 교회에서 잘하는 것으로만 기준한다면, 예를들면, 예배드리는 것, 헌금하는 것,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 봉사하는 것, 신앙교육과 양육을 받는 것으로 기준한다면, 그게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외친 이스라엘과 뭐가 다르고, 니골라 당의 행위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무엇보다 신앙의 열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에 열심을 내고, 제자훈련, 큐티훈련..., 다양한 교육과 훈련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인격과 성품과 삶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게 니골라 당의 행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좋은 신앙, 훌륭한 신앙이란 결과적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따듯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마음이 넓은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놓쳤다면, 니골라당인 것입니다. 물론, 여러분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가지게 된 것은 1차적으로 목회자들의 책임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 열심과 복만 강조했지 인격과 성품을 만들어 가는 삶에 대해서는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 대한민국에 동성애문제는 심각합니다. 그래서 동성애 합법화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안에도 동성애가 있고, 성적인 타락이 심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고치지 않으면서 동성애 합법화만 반대하는 것도 니골라당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비극을 만든 이유이고, 오늘날 이 나라를 이렇게 만든 원인인 것입니다. 이렇듯 나와 나의 삶을 고치지 않는 것이 니골라당입니다. 이 나라를 세우고, 한국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니골라당의 행위를 해결해야 합니다. 즉, 나를 고쳐야 하고 신앙과 삶의 이원화를 해결해야 합니다. 

  3.내 삶의 모든 자리를 신앙의 자리, 훈련의 자리로 여기라! 
 저는 우리 교회안에 니골라당의 교훈이 없기를 바라고, 여러분의 모습속에서 니골라당의 행위가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교회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모습이 한결같고,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을 교회에서 가정, 사회로 확대해 가고, 무엇보다도 나를 더 고치고 변화시켜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 더 사랑스러운 사람, 더 따뜻한 사람, 더 아량이 넓은 사람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나가서 교회의 일꾼은 사회에서도 인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끝임없이 자신을 점검하고 고쳐가고, 변화시켜 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런 성도가 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골라’라는 말의 헬라어는 ‘니칼라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바라암’ 곧 발람이 된다고 합니다. 즉, 이 두 단어는 어원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의 뜻은, ‘소모시키다, 낭비시키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 단어를 ‘방탕’ 이라는 단어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방탕이 무엇입니까? 주어진 시간, 현실, 상황을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는, 자신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신앙의 기회로 삼지 않는 것과 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을 방탕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니골라당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주어진 시간, 지금 주어진 상황, 지금 주어진 현실을 나를 고치고 변화시키기 위한 신앙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교회안에서만 하고, 교회 밖에서 안하기 때문에 니골라당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나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안에서만 의무와 책임을 다합니다. 그래서 니골라당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신앙의 자리는 내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 모든 장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그 곳에서 나를 고치고 변화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내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부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이 달라지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들의 모습속에서 니골라당의 행위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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