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i TV > 설교말씀 > 요한이 본 예수님! (요한계시록강해7)
HOME 로그인회원가입
교회안내 설교말씀 목장 및 양육 선교사역 부서소개 사랑방

  사랑 i TV  
     설교말씀 
     찬양영상 
     행사영상 
     성가대찬양 
     찬양소개 
     QT영상 





설교말씀
    > 설교말씀 >>  수요설교
 
[수요설교] 요한이 본 예수님! (요한계시록강해7)
 본문말씀 : 계1:10-20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19.7.10
조회 : 9,006   추천 : 0  
본문 : 계1:10-20절   요한계시록강해7 
제목 : 요한이 본 예수님!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제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우리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을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더 잘 믿을 수 있고, 예수님을 알아야, 닮아갈 수 있고, 예수님을 알아야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야 우리는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 알게 될 때, 신앙의 유익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인함으로, 여러분의 신앙에 더 큰 유익을 얻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일곱교회에 보내라’ 로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네가 본 것’ 으로 끝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본 환상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본 환상이 무엇인가? 입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 대접, 천상의 모습, 무서운 재앙, 666, 음녀, 짐승..., 등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본 환상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13절에, ‘일곱 금촛대 사이에 계신 예수님’ 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을 생각하면, 항상 가장 떠오르는 장면은 재앙, 징조, 전쟁, 심판..., 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 가장 먼저 보여주고 있는 환상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이 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릅니다. 이 말은, 그 만큼 요한계시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이고, 요한계시록을 잘 못 알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본 일곱 금촛대를 붙잡고 계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참고로, 금촛대에 대해서는 다음번 설교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금촛대를 붙잡고 계신 예수님의 모습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3절을 보면, 예수님의 옷차림에 대해서 소개를 합니다. 즉,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라고 소개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되었던, 1세기 당시의 옷은, 신분을 나타내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 발에 끌리는 옷은 3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왕의 옷이고, 둘째, 제사장의 옷이고(금 띠), 셋째, 법관 곧 재판장의 옷입니다. 즉, 당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노예들은 무릎이 보이는 옷을 입었습니다.(참고 –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동이신 것은 노예의 모습으로 섬기심을 의미) 결국, 예수님의 이 옷차림은,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시고, 왕이시며, 특별히 재판장이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점은 14절 이하에 소개되는, 예수님의 용모에서 잘 확인 됩니다. 먼저, ‘머리까락’은 흰 양털 같다고 말을 합니다. 즉, 머리카락이 희다는 것입니다. 머리까락이 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참고로 요한계시록에는 색깔이 의미하는 바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흰말, 검은말, 황색말..., 등  특별히 흰색은 지혜와 순결, 공정과 위엄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서양에서(특별히 영국) 재판관이 재판을 할 때, 흰색가발을 쓰고 재판을 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지혜와 순결함으로 공정하게 그러나 위엄 있게 재판하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눈’ 은 불꽃같다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 보여지고 들어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안에 감추어지고 보여지지 않는 마음과 생각까지도 다 보고 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또, 15절에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다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주 강하고 단단한 발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즉, 악과 사탄의 세력을 발로 밟으실 분, 곧 심판을 시행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 ‘입’ 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고 말을 합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칼로 비유를 합니다. 히4:12절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또, 엡6:17절에서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리고 계19:15절에서도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렇듯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검으로 묘사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하여 심판하시겠다고 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입에서 10절을 보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 이 나오고, 15절에서는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이 나온 것입니다. 즉, 온천지만물을 호령하는 권위와 위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절에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영광을 얻으셨지만, 앞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지극히 더 큰 영광을 얻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상이 사도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이 본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첫째는 왕이신 분이시며, 둘째는, 온 세상을 심판하실 재판장입니다. 즉, 악인을 심판하고, 악의 세력 곧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실 권세와 엄위를 가지신 분으로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각 사람과 온 세상을 심판하실, 재판장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내안에 예수님께 책망받을 만한 모습, 꾸중들을 만한 잘못들이 없는가를 점검하고 고쳐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안에 감추어진 죄, 아직 들통나지 않은 죄를 살피고 해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판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안에 책망과 꾸중받을 만한 모습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는 일은 없습니다. 종 종 구원이 취소 될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러나 꾸중받을 만한 모습에 자신을 방치한다면 그런 모습은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날마다 돌아보고, 예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책망받을 만한 모습에 대해서는 계2-3장에서 구체적으로 묵상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보고, 기록한 예수님의 모습은 단지 왕이시고, 재판장이신 분으로만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기록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은 그가 예전에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요한(ad6-100년)은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3년간 곁에서 보았던 사람입니다. 특별히 사도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사람입니다.(변화산, 겟세마네, 회당장 야이로...,등) 이렇듯 사도요한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았고, 기억하고, 예수님이 당하신 일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 예수,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아닌,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도 아닙니다. 사도요한이 본 예수님은 결국, 하나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보고 기록한 예수님의 모습이 모두 구약에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한 용어들인 것입니다. 예를들면, 인자 같은 이(단7장), 발에 끌리는 옷(사6장), 머리와 털의 희가가 흰 양털 같고(단7장), 눈은 불 꽃 같고(단7장), 그 발은 빛난 주석 같고(단10장), 많은 물소리(겡43장, 시93편) 뿐만 아니라, 17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런 뜻입니다. 역사를 시작하고, 그 시작하신 그 역사를 완성하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라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17절을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본 사도요한의 반응에 대해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입니다. 사도 요한은 왜 이런 자세를 취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신성 곧 하나님 되심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구약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에게 나타난 반응과 일치합니다. 결국,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당시 교회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소개하고자 하는 예수님은 곧 성자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2.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이유?
 이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사도요한에게 보이시고, 사도 요한은 성자 하나님의 모습을 당시 교회들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크게 2가지를 목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교회와 성도들의 최후의 운명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요한이 처음 본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나사렛 사람이라고 무시를 당하고, 잠시 사람들에게 환호와 인기를 얻지만, 곧 그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예수님을 반대하고 미워하는 권세자들에게 무기력하게 붙잡히시고, 끌려가시고, 권세자들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으시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하시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과 당시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교회와 성도들 역시 로마라는 권세자들에게 반대와 미움을 당했고, 이로 인해서 권세자들의 법정에 서고, 법정의 판결에 따라서 많은 박해와 고난을 당했으며, 심지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 교회와 성도들이 비록 지금은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그것이 그들의 결말이거나, 그것이 그들의 최후의 운명이거나 그렇게 망하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을 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마치 누구처럼 말입니까?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반대와 미움, 죽임을 당했지만 그것이 최후의 운명이 아니셨고, 성자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가지심이 최후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비록 그들이 권세자들에게 반대를 당하고, 미움을 당하고, 죽기 까지 하지만, 예수님처럼 영광과 존귀로 옷입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심판하는 승리의 날이 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전6:2절을 보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고전6:3절을 보면,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고 말을 합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예수님은 당시 교회와 성도들을 그리고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좋습니까? 좋은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지금 우리는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교회와 성도들처럼,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가지고 있는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오늘 성자 하나님으로 소개되는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분에게는 큰 위로와 소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자 하나님으로 소개되는 예수님의 모습이 아무런 위로도 소망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성자 하나님으로 소개되는 예수님의 모습이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십니까? 참다운 신앙이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이런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성자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붙잡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조금 전에 교회와 성도들의 운명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영광과 존귀와 승리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와 성도들의 운명이 영광과 존귀와 승리일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자 하나님으로 소개되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붙잡고(함께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13절을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또, 16절에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여기서 일곱 별은 누구일까요? 20절에서는 ‘일곱 교회의 사자’ 라고 말을 합니다. 논쟁이 많은 표현입니다. 일곱 교회의 사자를 교회를 지키는 천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곱 별 곧 일곱 사자는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즉, 성자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들을(교회) 오른손 곧 권세와 능력을 붙잡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회와 성도들의 최후 운명은 영광과 존귀와 승리일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손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능력의 손을 붙잡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능력의 손으로 모든 성도들을 지키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와 성도들을 존귀와 영광과 승리로 운명 짓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래서 롬8:35-39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고 선언한 것입니다. 좋습니까? 좋은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여러분 모두도 매일의 삶에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소극적으로 말을 한다면, 매일 찾아오는 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을 한다면,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백성다운 삶을 살아내셔야 합니다. 이것이 존귀와 영광과 승리의 운명을 약속받은 성도들의 마땅함인 것입니다. 결국,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가장 먼저 보여주고자 하는 장면은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교회와 성도들을 능력의 오른손으로 붙들고 계신 성자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3.신앙이란?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믿음 또는 신앙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을 보면, 믿음은 시선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히11: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처럼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지어 설명하겠습니다. 당시 교회와 성도들은 로마로부터 대대적인 박해를 당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요한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실적인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교회와 성도들을 붙들고 계시고 또 다른 진정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각도로 설명을 한다면, 믿음이란 내가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근거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쉬운 예로 설명하겠습니다. 12명의 정탐군들 중에 10명은 악평을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가 그 악평에 원망과 불평으로 동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10명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악평과 원망과 불평을 했을까요? 그것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자신들의 실력에 근거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왜 긍정적으로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 역시 살다보면, 종 종 두려워하고 낙심하고 절망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어진 상황에 내 자신을 중요한 근거로 삼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마6장에서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 내 자신이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근거 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보이는 현실만 볼것이냐? 보이지 않는 그러나 진정한 현실이신 하나님을 볼것이냐의 싸움, 내가 근거가 될 것이냐 하나님을 근거로 삼을 것이냐의 싸움이 영적인 싸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마주하는 현실이 어떠하든 그것만 현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여러분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이 더 큰 현실임을 알고 인정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나가서 여러분을 근거로 삼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을 근거로 삼는 인생을 살아 가십시오! 이것이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을 소개하는 하나님의 의도이며 목적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요17:3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라 했습니다. 즉, 참다운 신앙이란 예수를 아는 것, 알아 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이 소개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으로 교회와 성도를 붙드시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자 하나님을 바라보고, 근거하는 삶을 통해서 그분을 따라가고 신앙을 지키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Share

 
 

번호 말씀제목 보기 본문말씀 설교자 설교일자 조회 추천
2533 [주일설교] 다시 걷기-변화된 삶으로   롬12:1-2절 최용민목사 2026.4.5 67 0
2532 [주일설교] 주일1부실시간예배   롬12:1-2절 최용민목사 2026.4.5 8 0
2531 [특별새벽기도] 소망하기!(고난주간5) 롬8:18-25절 최용민목사 2026.4.3 43 0
2530 [특별새벽기도] 사랑하기!(고난주간4) 롬5:6-11절 최용민목사 2026.4.2 610 0
2529 [특별새벽기도] 한 걸음 내 딛기!(고난주간3) 잠16:1-9절 최용민목사 2026.4.1 491 0
2528 [특별새벽기도] 방향 묻기!(고난주간2) 시119:57-64절) 최용민목사 2026.3.31 658 0
2527 [특별새벽기도] 기억하라!(고난주간1) 시77:1-12절 최용민목사 2026.3.30 352 0
2526 [주일설교] 거룩한 멈춤! 집중!(고난주간) 시46:1-11절 최용민목사 2026.3.29 3580 0
2525 [주일설교] 주일1부실시간예배 시46:1-11절 최용민목사 2026.3.29 112 0
2524 [수요설교] 다시 세워진 신앙!(사사기강해15) 삿6:25-32절 임승철목사 2026.3.26 2143 0
2523 [수요설교] 수요예배실시간 삿6:25-32절 임승철목사 2026.3.25 108 0
2522 [주일설교] 신앙 성장과 습관(習慣)! 엡4:17-24절 최용민목사 2026.3.22 2307 0
2521 [주일설교] 주일1부실시간예배 엡4:17-24절 최용민목사 2026.3.22 118 0
2520 [주일설교] 주일2부실시간예배 엡4:17-24절 최용민목사 2026.3.22 160 0
2519 [수요설교] 원칙(原則)이 있는 신앙!(사도행전강해96) 행17:1-9절 최용민목사 2026.3.18 186 0
2518 [수요설교] 수요예배실시간 행17:1-9절 최용민목사 2026.3.18 228 0
2517 [주일설교] 신앙 성장과 결단! 왕하5:15-19절 최용민목사 2026.3.15 366 0
2516 [주일설교] 주일1부실시간예배 왕하5:15-19절 최용민목사 2026.3.15 176 0
2515 [수요설교] 위로받고 위로하고!(사도행전강해96) 행16:35-40절 최용민목사 2026.3.11 154 0
2514 [수요설교] 수요예배실시간 행16:35-40절 최용민목사 2026.3.11 255 0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