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호14:9절 호세아서강해 최종회
제목 : 하나님의 사랑!
성도들의 삶속으로
어느 교회에 청상과부(젊어서 과부가 되어 수절하고 산 여자)로 22살된 외아들과 함께 살던 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에게 아들은 남편과 같은 존재이고, 위안과 의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목사님이 급히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권사님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그저 손만 잡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권사님이 한마디 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제가 아들을 잃고 나서 깨달은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얼마나 큰 사랑인지 깨달았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을 잃은 사건을 통해서 권사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로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심으로 나타낸 사랑!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간단히 의역을 하면, 누가 하나님의 크고 깊고 넓은 사랑을 깨닫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다르게 말을 하면,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깨달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은 그 길로 다니거니와 그러나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지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누가 의인입니까? 호세아서가 말하는 의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것을 마지막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43주간 호세아서를 함께 묵상을 했습니다. 호세아서의 가장 크고 중요한 주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호세아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오늘 이 마지막 시간에 3가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구원하시고 복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을 합니다. 먼저, 선택이라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호11:1절을 보면, ‘내가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사랑하여 라는 단어는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선택하시는 사랑을 말할 때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곧 장자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출4:2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로왕에게 보내실 때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십니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들 곧 장자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장자로 선택하신 것이 왜 사랑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장자로 백성으로 선택받을 만한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호11:1절에서는 ‘어렸을 때’ 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어렸을 때라는 말은 철이 없고 연약하고 힘이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또, 신7:6-7절을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고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설명합니까? 모든 민족보다 수효가 작고, 적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미약하기 때문이라는 말입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미약함이 선택의 이유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만큼 자격과 조건을 갖지 못한 민족을 선택했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 아들, 장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애굽땅에서 해방시켜주시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것 역시 크신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신 사건이 사랑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애굽의 압제와 억압에서 풀어주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해방사건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인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해방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자신을 계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애굽땅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그 10가지 재앙은 애굽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 10가지 재앙은 재앙이 아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해주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민족에게도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특별히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더 분명하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크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 큰 복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호세아선지자가 사역 할 당시 북왕조 이스라엘은 대단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을 하면, 솔로몬시대를 재현한 것곽 같다고 말할 정도로 큰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 북왕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고, 하나님이 아닌 강대국들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복을 받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주시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을 받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이야기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들 역시 하나님께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사람들이며, 죄와 죄의 모든 결과로부 해방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이 왜 크신 사랑이 됩니까?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을 만한 그 어떤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가장 잘 소개하는 본은 엡2:1-9절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표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을 때, 우리의 상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의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선택을 받지 위해서, 다르게 말하면, 선택의 조건인 의를 갖출만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의에 대하여 죽은 자였기 때문이고.’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자’였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 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을 만한 그 어떤 자격이나 조건을 갖출 수 없었던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자녀로 선택해 주시고, 모든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주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축복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사랑 말고는 설명할 수 있는 정당한 방법이 없습니다.
2.심판으로 나타낸 하나님의 사랑!
호세아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두 번째는, 바로 심판입니다. 이 부분이 호세아서 말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판과 사랑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심판은 사랑이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주는 증명인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3가지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심판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쉽게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크게 화를 내시고, 분노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화를 내고 분노를 한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을 향해서 분노하시지만, 그리고 멸망을 당하게 하시지만, 이러한 심판은 그들을 겁주기 위한 메시지가 아니라,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 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호11:8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기로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 바로 분노이고 심판인 것입니다.
둘째로, 심판은 하나님께서 우리 수준, 우리의 현실, 우리의 한계에 찾아오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는 말에 거부감을 갖습니다. 그 이유는 분노는 하나님의 수준이 아니라, 우리의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또, 목회자가 화를 내거나 분노하면 성도들은 실망합니다. 그것은 목회자의 수준이 아니라 성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분노하신다는 말은 결국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화를 했다, 분노했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수준으로 내려 오셨다는 말이고, 우리의 수준에 동참하신다는 말인 것입니다. 예를들면, 출32장을 보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이후 시내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그 결과 3000명 가량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출33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 땅에 안들어가시겠다고 분노하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크게 분노하십니다. 그 말은 지금 분노를 당하는 그들의 자리에 함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에게 삐친 사람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안가겠다고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준과 현실에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분노란 하나님께서 우리가 실패한 자리, 우리가 넘어진 자리,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찾아오셨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품었다는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셋째로, 자존심을 버리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열국 중에서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신 민족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선택해서 자기 백성 삼은 자들을 심판한다면 결국, 자존심 상하는 일인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왜 심판하십니까?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바알이 주었다고 착각했고,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경고해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각도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심판과 멸망을 보는 이방나라의 관점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과연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으로 보일까요? 심판하시는 분? 무서운 분?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실패하신 분, 이방신보다 약한 분으로 보여지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이방나라로 심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 입장에서는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부끄러움이나 그러한 자존심 상하시는 일들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의 평가보다는 북왕조 이스라엘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솔로몬의 재판에 등장하는 아기 엄마와 같습니다. 어느날 솔로몬에게 한 아기를 데리고 두 여자가 찾아왔습니다. 이유는 누가 친모인지 밝혀 달라는 겁니다. 결국, 솔로몬은 아기를 반으로 잘라 공평하게 나누어주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친모는 그 아기를 상대편 여자에게 주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아십니까? 자신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친모가 자신이 거짓말쟁이가 되고, 나쁜 여자가 되는 것을 개의치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기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자기 손으로 심판을 하십니다. 그로 인해서 자존심도 상하고, 부끄러울 수 있지만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심판은 사랑인 것입니다.
3.하나님이 우리의 주권자(책임자)가 되심으로 나타난 사랑!
호세아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세 번째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주권자가 되어주신다는 점입니다. 말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북왕조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설명을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고, 그로 인해서 멸망할 것이라는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그렇다면, 북왕조 이스라엘이 심판과 멸망이 경고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죄악들은 무엇입니까? 이미 여러차례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것, 우상을 숭배한 것,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한 것...,등입니다. 이러한 죄로 인해서 북왕조 이스라엘은 심판에 대한 경고와 멸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한 북왕조 이스라엘이 만들어낸 운명(결과), 그들이 결국 맞이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서 마지막 부분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이야기였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복주실 것이라고, 다르게 말하면,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시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뜻밖에도 북왕조 이스라엘의 운명은 회복과 승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해할 수 없는 운명(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멸망이라는 운명을 맞아야 할 북왕조 이스라엘이 회복과 축복을 맞는 운명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회개했다면, 멸망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심판과 멸망이라는 운명이 아닌, 회복과 승리라는 운명을 갖을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북왕조 이스라엘의 운명을 그들의 손에 맡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권자, 책임자가 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호세아서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사람들의 운명을 그들의 실력에 맡겨두지 않는 분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 모두는 불행한 인생을 살고, 실패하는 인생을 살고, 멸망할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주권자가 되시어,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시는 역할을 하십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자격은 없습니다. 그러니 은혜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위함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은 복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묶인 자가 되었고, 하나님이 여러분과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러한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승리할 것입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실패와 못남과 우리의 불의를 해결해주시지 않을까요? 왜 현실적인 증거를 안주실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기고,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믿음을 더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은 믿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지만,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믿음은 ‘거부할 수 없는 힘’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할 수 없고, 하나님 없이는 살수 없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하나님은 사랑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깊고 넓고, 그래서 측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선지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하고 복주시는 사랑, 우리를 심판하시는 사랑(포기할수 없고, 우리의 수준에 오시고, 자존심을 버리신), 그리고 우리의 주권자가 되시어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서 참다운 신앙인 우리의 인격과 성품을 다듬고 고쳐가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