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호14:1-3절 호세아서강해42
제목 : 돌아오라!
성도들의 삶속으로
오래전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아빠에게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느날 딸이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뇌종양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완치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의사가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딸을 포기 할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뇌종양에 대한 책을 찾아 공부하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딸과 비슷한 뇌종양을 여러차례 성공적으로 수술한 미국의 한 의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하고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딸을 포기하지 않은 아빠로 인해서 딸이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북왕조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배우고, 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이제 호세아서의 마지막 장이 되었습니다. 호14장은 호세아서 결론부분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라’ 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면서, 한가지 분명히 하고 계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네가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느니라.’ 고 말을 합니다. 쉽게 말하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의 책임은 그들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이 그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멸망을 당하게 될 북왕조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착각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북왕조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이 이방나라의 우상들보다 힘이 약해서 멸망한 것 아니냐?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자기 백성을 지키지 못하는것 아니냐?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하신 것 아니냐? 그래서 북왕조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이라고 얼마든지 착각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북왕조 이스라엘은 지금까지의 역사속에서 그런 착각을 많이 해왔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광야에서 마실 것 먹을 것이 없을 때,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이후에 그들은 우리를 죽이려고 데리고 오신 것이 아니냐? 라고 착각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우상숭배에 빠진 이유 역시, 하나님으로는 부족하다는 착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멸망의 모든 책임이 그들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봅시다. 과연 우리는 어떤 원하지 않는 일과 결과에 대해서 내 책임이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누구 때문이고, 하나님 때문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먼저, 내가 아닌 다른 누구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를들면, 내가 지금 힘든 것, 내가 지금 불행한 것, 내가 지금 어려움을 격는 것..., 등 범죄한 인간은 끊임없이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를 했습니다. 예를들면,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왜 먹었냐고 물으실 때, 아담은 하와 때문이라고 했고,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책임은 없는 것입니다. 또, 불순종한 사울왕에게 왜 불순종했냐고 했을 때, 사울왕은 백성들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1달란트 받은 종은 자신이 장사를 하지 않고 땅에 묻어둔 이유를 주인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죄성을 가진 인간의 잘못된 성향입니다. 또, 혹시, 내가 격는 어떤 일에 대해서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미 말씀 드린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게 된 책임을 하와에게만 전가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탓하고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요나를 보십시오! 요나는 니느웨성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을 보고 대단히 불쾌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이 상하고 괴로운 것을 하나님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혹시 우리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을까요? 혹시, 지금 여러분도 내 안에 있는 어떤 실패, 불행, 불만족스러움을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구 때문에..., 또 하나님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의외로 많습니다. 가장 좋은 예는,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불평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게 하나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종 종 기도 가운데 ‘하나님 왜 이런 일을 격게 하십니까?’ 라고 고상하게 기도를 합니다. 물론, 이러한 기도를 통해서 어떤 일을 격게 되는 내 안의 이유를 찾으려는 마음도 분명히 있지만, 하나님께 책임을 묻으려는 의도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누군가에든, 하나님에게든 책임을 전가해서는 않됩니다. 도리어 내안에서 이유와 책임을 찾을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신앙에 유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고 불의했기 때문에, 그들의 잘 못 때문에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을 심판하고, 징계하시고, 멸망하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버리고 포기하시는 분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북왕조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선지자를 통해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북왕조 이스라엘을 끝까지 불의한 자리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경고하시고 분노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욱이 필연적으로 멸망당하게 될 북왕조 이스라엘에게 멸망 이후에라도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북왕조 이스라엘이 아무리 불의하다 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기를 포기할 수 없고, 그들을 내 백성으로 여기는 일을 포기할 수 없고, 그들을 사랑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고, 그들을 복이 되게 하시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호11:8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사42:3-4절에서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는’ 분 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하고 사랑하기로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이 점은 성경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메시야를 통한 회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창3:15절) 노아시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죄악이 관영한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홍수로 벌하셨지만, 그들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지개언약까지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제자로 부름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권력을 갖기를 원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베드로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죽자 제자들은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그들을 찾아가셨고, 다시금 제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눅15장의 탕자의 비유입니다. 즉, 아버지의 아들로 살기를 거부하고 집을 나간 아들을 한없이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참 갈등되고 어렵고 힘든 순간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대로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경우로 예를들어 보겠습니다. 야곱은 정말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장자권 사건으로 집에서 도망쳐야 했으며, 라반 삼촌 집에서 고달픈 시간을 보냈고, 형에서로 인한 두려움의 순간을 만났고, 디나사건, 요셉사건...,등 정말 고달픈 인생을 살았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그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인생에 끊임없이 간섭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고달프고 힘든 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간섭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2.돌아오라!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점, 그래서 우리를 고달프게 하고, 힘들게 하신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고달프게 하고, 힘들게 하시는 더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2절에서도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씀이 바로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북왕조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모든 은혜의 출발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고, 회개 없는 은혜주심이 없고, 회개 없는 기쁨과 감격도 없고, 회개없는 신앙의 성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회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가장 최근에 회개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번 주간에 여러분이 회개한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여러분이 회개한 것은 무엇입니까? 없습니까? 그러면 정말 회개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까? 아닙니다. 회개한 것이 없다는 것은, 회개를 못할 정도로 신앙이 무너지고 병들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아직도 회개할 것이 많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들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입니다.
그럼 회개와 관련해서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회개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나의 죄를 깨달고, 하나님께 잘못되었음을 시인하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회개는 반드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기준으로 나의 잘못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회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답이 나오느냐에 따라서 여러분이 하는 회개가 올바른 회개일수도 있고, 올바르지 못한 회개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나의 죄를 인정하고 시인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회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죄로 인해서 받게 될 벌이나 진노가 무서워서, 그래서 그것을 피하기 위함입니까? 물론, 우리들이 신앙을 처음 갖게 될 때의 회개는 그런 의미에서의 회개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 후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후로는 그러한 회개는 올바른 회개, 참다운 회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종 종 어린 자녀들이 뭔가를 잘못하면 부모들이 무섭게 야단을 칩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금방 잘못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네가 무엇을 잘못했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왜 잘못했다고 말을 합니까? 그것은 부모에게 야단을 안맞기 위함이고, 벌을 피하기 위함일 뿐인 것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확인해보도록 합시다. 먼저, 마3장입니다. 보면,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외치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그러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요한에게 나왔고, 회개함의 증표로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례받으려는 무리 중에 누가 있었냐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그들에게 한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입니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많은 백성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회개의 목적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많은 백성들의 회개는 요한의 의도에 맞는 회개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회개의 목적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진노를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꾸중한 것입니다. 그들의 회개가 올바른 회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가 또 있습니다. 삼상1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말렉과의 전쟁 이후 다 진멸하라고 말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한 사울이 사무엘선지자에게 꾸중을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울을 버릴 것을 전합니다. 그러자 사울왕은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라고 회개합니다. 그 회개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진노, 버림받는 벌을 피하기 위한 회개입니다. 이것은 참다운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구약 북왕조 이스라엘의 회개가 늘 이런 이유였고, 때로는 우리의 회개도 이러한 이유일 때까 많습니다. 그 결과 늘 동일한 죄를 반복하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르고 참다운 회개? 회개의 이유와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항복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라는 것은 진정한 항복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깨달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깨달고, 시인하고, 고백하는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 항복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2-3절을 보십시오! 단순한 깨달음, 시인 고백이 아니라 항복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항복이 바로 회개인 것입니다. 예를들면, 탕자를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의 유산을 재촉하여 먼 나라에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게 됩니다. 고달픈 순간을 만난 것입니다. 그 때, 탕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살겠다고 항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이런 회개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는 사건과 사고속에서 우리를 고달프게 하고 힘든 순간을 겪게 하시는 것입니다. 항복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신앙이라는 것 역시 항복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지금까지 항복하지 못한 것들을 하나 하나 항복해 가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신앙이란 끊임없는 항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에 고달픈 것은 없습니까? 그 이유가 무조건 죄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고달픈 순간 가운데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점검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항복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안에는 하나님께 항복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존심의 문제에, 교만의 문제, 경제적인 문제에, 관계의 문제에, 용서의 문제에, 사랑의 문제에, 결단의 문제에, 순종의 문제에..., 항복하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우리는 모두 북왕조 이스라엘과 같이 늘 범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인생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힘겨움과 고달픔을 겪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회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그리고 항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된 성도의 삶이며, 은혜이며, 축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