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막15:1-15절
제목 : 나를 위한 죽음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묵상할 막15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던 하루 동안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죽음과 관계된 3명의 인물을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즉, 첫째는 예수님을 재판하여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이며, 둘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짊어진 구네레 사람 시몬이며, 셋째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희롱하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이 3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예수님이 만난 사람들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황제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고 유대 땅을 통치하던 총독이며, 역사상 사람들의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로마인일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데리고 갑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빌라도에게 데리고 간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여러분의 짐작대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빌라도에게 데리고 갔을까요? 그것은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형을 선고할만한 권한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사형 승인을 받기 위해 갔으며, 또 다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손이 아닌, 로마인의 손을 빌어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재판이 이루어진 시점이 언제냐는 것입니다. 언제입니까? 1절을 보면, 빌라도의 재판이 ‘새벽’에 진행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빌라도의 재판이, 즉, 예수님이 받은 재판이 합법적인 재판이 아닌, 불법 재판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대제사장과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의 재판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중범죄에 대한 재판은 반드시 해가 뜬 후에 해야 하고, 재판이 길어져 밤이 되면 재판을 중단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이 모를리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은 불법 재판으로라도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드디어 재판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재판을 맡은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평행 본문인 요19:26절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또한, 마27:19절을 보면, 빌라도의 아내 역시 ‘예수님이 옳은 분’임을 알고 빌라도에게 죽이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가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잘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눅23장을 보면,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내게 됩니다. 즉,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어느 정도의 노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찾아온 대제사장들의 요구대로 예수님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빌라도는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넘겨주었을까?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15절에서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라고 말을 합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면서도 대제사장들과 유대 무리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재판받고 있는 시기가 유월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월절은 전국, 또는 해외에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성에 모여 하나님께 반드시 제사를 드려야 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유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책을 보면, 유월절에 최소한 200만명(고양시가 100만명) 이상의 인구가 모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예루살렘성은 그리고 큰 성이 아닙니다. 여러분 상상 해보십시오! 그 작은 예루살렘성에 200만명 이상이 모인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참 복잡하고, 치안과 관련된 문제도 많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더욱 유월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을 받은 날입니다. 마치 우리 나라의 광복절과 같은 날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이스라엘이 로마에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에는 로마에 대한 크고 작은 폭동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유월절은 로마에 눈치를 보는 유대지도자들에게도 신경쓰이는 절기이며, 로마정부도 대단히 신경 쓰이는 절기였습니다. 더욱이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지난 3년간 유대 땅을 떠들썩하게 했던 예수님입니다. 그러기에 빌라도는 굉장히 조심스럽고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만일 빌라도가 유대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재판을 할 경우, 아주 큰 폭동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결국에는 로마 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될 것이고 총독의 자리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번 예수님의 재판을 잘하게 된다면, 유대인들에게도 마음을 얻을수 있고, 무엇보다도 로마황제에게 정치력을 인정받고, 더 큰 신임을 얻고, 더 나은 권세를 누릴 수 있는 기회, 어쩌면 빌라도의 인생에 다시 올수 없는 성공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성공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대제사장들과 성난 군중들의 요청대로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만난 두번째 사람은, 21절의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고 소개되는 “구레네 사람 시몬”입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몬이라는 사람이 유대인과 흑인사이에서 태아난 혼열인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비록 혼혈인이지만 유대인의 피를 가진 사람으로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다는 점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물론 자발적인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가 혼혈인이었기 때문에, 로마군사들의 눈에 띄었을 것이고, 로마 군사들에게 의해서 십자가를 짊어졌을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예수님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나, 돕고자 하는 자비의 마음이 아닌, “억지로” 였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구레네 시몬은 십자가를 짊어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수가 짊어지는 것이며 또, 신21:22-23절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즉,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만 짊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몬은 십자가를 짊어지기 싫었습니다. 그러나 군사들의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이후에는 더 이상 복음서에는 구레네 시몬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13:1절을 보면, 오늘 본문의 시몬으로 추정되는 ‘니게르(니그로:흑인종)라 하는 시므온’ 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것도 안디옥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의 담당하던 지도자들 중 한사람으로 소개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막15:21절을 보면, 구레네 시몬의 2아들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바로 알렉산더와 루포입니다. 마가가 자신의 복음서에서 구레네 시몬의 아들의 이름을 기록했다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대해서 다른 부연 설명이 없다는 것은, 그의 2아들이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진 신앙의 유명 인물들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롬16:13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사랑하며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헌신한 동역자의 이름을 기록할 때, 구레네 시몬의 아들인 루포를 언급하고 있으며, 그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레네 시몬의 아들인 루포와 시몬의 아내 역시 초대교회의 유명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구레네 시몬, 그의 아내, 그리고 2아들인 알렉산더와 루포 모두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위대한 인물들, 가정이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때로는 억지로라도 하는 신앙이 유익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든 순간, 모든 일을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감사와 자원하는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을 사랑하거나, 신앙이 좋은 사람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를 짊어질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싫지만 로마 군인들의 힘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골고다에 다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신 진 십자가를 예수님께 건내 주었을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을 앞두고 만나 마지막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16-32절을 보면, 그들을 “희롱하는 자”들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희롱이라는 말은 조롱 또는 비웃음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17-20절을 보면, 군인들이 예수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씌우고, 유대인의 왕이어 라고 비웃으며, 갈대로 머리를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희롱을 했습니다. 그리고 29-30절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 또는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가로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희롱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사렘에 입성하 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라고 열광하며 외쳤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31-32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료ㅕ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라고 희롱했습니다. 심지어 32절을 보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밖힌 자들까지 그와같이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제사장, 군사들이 예수님을 희롱한 것은 그렇다 치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라고 외쳤던 사람들까지 예수님을 희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13절처럼 예수님을 못밖으라고 소리치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그토록 원하고 바라고 기대하던 일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원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예수님이 가진 능력과 권세로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켜주고, 세상의 어떤 나라도 넘보지 못할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했던 것, 즉 한마디로 말하면, 다윗과 같은 왕이 되어주기를 원했던 것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병들에게 저항조차 못하고 너무나도 무기력하게 체포당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리들이 예수님을 희롱한 이유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 인 것입니다.
2.과연 누구를 위해 죽으셨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만난 3부류의 사람들에게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누구입니까? 빌라도, 구레네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희롱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37절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죽으셨을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수치로 여김으로, 십자가를 지기 싫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위해 죽으셨고, 그리고 자신들의 만족을 채워주지 않자, 비웃음과 조롱하던 사람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한주간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한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의 죽음을 막연한 인류와 인간을 위한 죽음, 또는 우리를 위한 죽음으로 여기지 않았나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분명히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이 시대의 빌라도인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때때로 빌라도와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어떤 이익 때문에 신앙의 양심을 팔아버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과 신앙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경우가 많고, 알면서 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이 시대의 구레네 시몬과 같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싫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힘든 신앙생활을 싫어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이 시대의 구레네 사람 시몬은 아닙니까?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또, 이 시대의 희롱하는 자와 같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들 역시, 2000년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희롱한자와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역시 같은 마음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정말 하나님이라면 내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 삶을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아버지라면서 원하는 것을 왜 안 이루어주십니까? 라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이 시대에 희롱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당시 못난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신게 아니라, 그 시대 못난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바로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점은 인정하십니까?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갖는 큰 실수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말씀을 들을 때,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라는 집단으로 이해하려든다는 것입니다.(참고로, 다수결은 자신을 감추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을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는 빌라도 같은 나, 주님을 위해서는 땀 한방울도 흘려보지 못하고, 헌신보다는 늘 편안한 길, 편안한 삶만을 원하는 구레네 시몬 같은 나, 그리고 늘 자신의 원함과 만족을 채워지지 않는다고 원망과 불평만 하는 희롱하는 무리와 같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죽어 주신 것입니다.
3.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요구!
그렇다면, 이 시대의 빌라도, 구레네 시몬, 희롱하는 자와 같은 나를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즉,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주님과 신앙을 등한시 하며 살았던 빌라도와 같은 삶, 주님이 맡기신 십자가(배우자, 자녀, 사명, 어려운 현실...,등)를 지기 싫어했던 구레네 시몬과 같은 삶, 그리고 자신의 만족과 원함을 채워주지 않았다고 원망과 불평하면 살던 희롱하는 자와 같은 삶을 회개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진심으로 주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둘째는,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즉, 다시는 빌라도가 되지 않겠다는 결단, 다시는 구레네 시몬이 되지 않겠다는 결단, 다시는 희롱하는 자가 되지 않겠다는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이 맡겨주신 십자가를 기쁨으로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만족이 아닌 주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 살아가기를 결단하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예수님은 2000년전 빌라도, 시몬, 희롱하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빌라도 같고, 시몬 같고, 희롱하는 자인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께 감사하고, 날 위해 죽으신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