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i TV > 설교말씀 >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호세아서강해32)
HOME 로그인회원가입
교회안내 설교말씀 목장 및 양육 선교사역 부서소개 사랑방

  사랑 i TV  
     설교말씀 
     찬양영상 
     행사영상 
     성가대찬양 
     찬양소개 
     QT영상 





설교말씀
    > 설교말씀 >>  수요설교
 
[수요설교]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호세아서강해32)
 본문말씀 : 호11:8-12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19.1.30
조회 : 10,458   추천 : 0  
본문 : 호11:8-12절   호세아서강해32
제목 :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성도들의 삶속으로   
 온누리교회 담임목사였던 고)하용조목사님께서 병상에서 쓴 글을 소개함으로 오늘 말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제목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나는 그를 버렸으나 그는 나를 버리지 않았고, 나는 그를 잃었으나 그는 나를 잃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를 업신여겼으나 그는 나를 귀히 여겼으며, 나는 그를 못 본 척했으나 그는 나를 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내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랑하십니까. 나는 그를 싫다고 했으나 그는 나를 예쁘다고 말했고, 나는 그를 무시했으나 그는 나를 사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요,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요,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이요, 보답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분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사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십자가에서 사랑하셨고, 갈보리 언덕에서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 이제 깨닫고 통곡합니다. 그 사랑 이제 깨닫고 가슴을 찢습니다. 그 사랑 이제 깨닫고 이렇게 글을 씁니다.’ 하목사님께서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커서 우리들은 이해 할수 없는 사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이해 할 수 없을 정도의 하나님의 사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이해 할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먼저, 8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보시면, 하나님께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해서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찌’ 라는 단어는 불가능한 일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즉, 어떤 이유에서도 결코 북왕조 이스라엘을 아드마처럼 스보임처럼 놓을 수 없고, 버릴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라고 말을 합니다. 즉,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즉,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온통 뜨거운 긍휼,  뜨거운 사랑으로만 가득 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신약성경에서는 요일4:8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의 눈 높이로 맞추어 말한다면, 창43장을 예를들 수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은 어느날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찾아온 자신의 형들을 만나게 됩니다. 특별히 동생 베냐민을 만나게 됩니다.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를 합니다. ‘아우로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함으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형들과 동생에 대한 요셉의 뜨거운 마음을 아시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은 요셉의 사랑과 비교할 수도 없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놓을 수 도 없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릴 수 도 없고, 마음이 식지 않고, 사랑 아닌 것을 행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9절을 보면,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화난 얼굴로 마주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또,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사람처럼 진노로 말미암는 실수가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좀 쉽게 바꾸어 설명하면, 종 종 부모는 아이의 잘못을 꾸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잠13:24절을 보면,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를 사랑함으로 매를 들고 징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꾸중을 하다보면, 사랑이 아닌 자신의 나쁜 감정을 들어낼 때가 있고, 사랑이 아닌, 분풀이가 나오거나, 자녀를 노엽게 하거나, 어떤 실수를 할 때가 많습니다. 즉, 사랑으로 시작했다가 사랑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이게 우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이 이유이며, 사랑이 목적인 완전한 사랑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북왕조 이스라엘은 이렇게 사랑하셨을까요? 북왕조 이스라엘이 사랑을 받을만 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8절을 보면, 창세기 10장부터 등장하는 2개의 고대도시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아드마’ ‘스보임’입니다. 여러분 이 두 도시가 어떤 도시인지 아십니까? 바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당할 때, 함께 멸망한 도시(성)입니다.(신29:23절) 그렇다면, 이 두 도시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죄악이 옛날 그 두 도시의 죄악과 조금 도 다를 바 없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 점은 여러분도 잘 아실 겁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많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번영이 바알 곧 우상이 주었다고 착각을 했으며, 자신들은 하나님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기 까지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은 늘 말뿐인 신앙이었고, 형식주의 신앙이었고, 두 마음이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자신이 원하는 일에 수단으로만 여기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왕조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간절한 호소에도 고집센 황소처럼 굴었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북왕조 이스라엘의 죄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떠난 죄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마드마와 스보임과 같았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이유가 그들이 사랑을 받을만 했기 때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드마와 스보임 같은,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북왕조 이스라엘을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인 것입니다. 물론, 북왕조 이스라엘만의 이야기를 아닙니다. 우리 모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완전한 사랑으로 사랑하셨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안에 하나님께 사랑 받을 만한 이유와 자격과 근거가 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단지 우리 스스로가 그럴 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그래서 목에 힘이 들어 가고, 교만스럽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우리에게 하나님께 사랑 받을 만한 이유와 자격과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점은 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이니’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 입니다. 그러면 임마누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셨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예수님은 구약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거하신다는 것은 모든 언약의 핵심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이니’ 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아드마와 스보임과 같은, 사랑받을 그 어떤 자격도 없는 북왕조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은 언약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십니까? 매일 매일의 삶에서 이러한 사랑으로 인해서 감격하고 계십니까?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혹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분은 안계십니까? 실감하지 못하는 분은 안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원하는대로 해주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면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안느껴지게 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현실, 상황, 결과물을 주시지 않으면 사랑을 의심하고 못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입니다. 왜냐하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의 큰 힘을 얻고, 그리스도인으로 마땅한 신앙의 내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바랍니다.
 
  2.이기게 하는 사랑! 
 우리는 지금까지 언약한 근거한 사랑, 그러나 우리의 수준에서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감격하게 하고 감동하게만 하는 그렇게 간단한 주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크게 진노하시고,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가장 가까운 본문으로는 우리들이 지금 살펴보고 있는 호11장 앞부분의 내용 역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5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6절 ‘칼이 그들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하리니.’ 라고 하나님께서 범죄한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북왕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호세아서 내용의 1/4은 심판(축복은 1/10)에 관한 기록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속에 내려졌습니다. 예를들면,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고,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고,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사사 시대에도 반복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왕정시대가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끝내 북왕조 이스라엘은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그리고 남유다는 bc586년 바벨론에 의해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물론, 포로귀환 이후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내려졌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전역사속에서 하나님 심판이 끊임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은 단순한 주제가 될수 없고, 하나님의 심판과 더불어 생각해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이 어떤 관계인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담겨진 메시지는 무엇인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크게 3가지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심판은 왜 주어집니까?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잘못합니까?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계적인 존재였다면 잘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프로그램화 된 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존재는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잘못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대우하십니다. 4절을 보면,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 즉, 이스라엘은 애굽나라에서 짐승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그들을 이끌었고’ 라고 말합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이 북왕조 이스라엘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대우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꾸중도 경고도 심판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점을 쉽게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시간이 조금 지나면 북왕조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멸망 당하고 말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해서 구구절절이 왜 심판하는 지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북왕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지만,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아 마땅한 북왕조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할 수 없고, 버릴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기로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이 점은 성경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고, 메시야를 통한 회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창3:15절) 노아시대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죄악이 관영한 삶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홍수로 벌하셨지만, 그들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노아의 방주를 통해서 보존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지개언약까지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제자로 부름받았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권력을 갖기를 원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베드로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부인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이 죽자 제자들은 제자의 삶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들과 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그들을 찾아가셨고, 다시금 제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이렇듯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 바로 눅15장 3가지 비유(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비유) 특별히 탕자의 비유가 가장 잘 보여줍니다. 즉, 아버지의 아들로 살기를 거부하고 집을 나간 아들을 한없이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 분노이며, 심판인 것입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셋째는, 이기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10-11절을 보시면,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애굽에서부터..., 앗수르에서부터 오리니...,’ 참고 애굽은 이스라엘의 남쪽이고, 앗수르는 동쪽입니다. 즉, 사방에서도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북왕조 이스라엘의 가장 대표되는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죄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돌아온답니다. 여기서 알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북왕조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목적은 그들의 죄에서 승리하게, 이기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북왕조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북왕조 이스라엘의 잘못을 묵인하지 않고, 모르척 하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적극적으로 북왕조 이스라엘이 죄를 이기고, 승리하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심판의 이유이며 목적인 것입니다.
  
 결국, 심판을 통해서 밝혀진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사랑이며,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며, 무엇보다도 우리를 이기게 만들어 내시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우리로 하여금 승리 또는 이기게 하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 고단하고, 어렵다는 생각을 가질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만하면 될 것 같은 정도로 열심히 하는데도 고단하고 어려운 순간들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우리들에게 고달픈 시간을 주시고, 어려운 순간들을 격게 하실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승리하는 자가 되고, 더 이기는 자가 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을 하면, 더 많은 부분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께 항복을 하고, 자발적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항복할 때까지, 자발적으로 순종할 때까지, 하나님은 속상하고, 답답하고, 분통터지는 과정이지만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입니다. 정말 놀랍고 큰 사랑인 것입니다.

  3.하나님 사랑에 대한 우리의 반응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2가지로 간단히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항복하십시오! 우리 모두는 아직 하나님 앞에서 항복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둘째는, 여러분도 하나님께 받은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십시오! 어떤 사랑입니까? 달콤한 사랑, 뜨거운 사랑, 호의를 베푸는 사랑..., 이것보다는 승리하게 해주는 사랑, 이기게 해주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종 종 사랑을 나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 곧 난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위선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이기게 만드는 것이고, 상대방이 이길 때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안다면,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정의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럴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고 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우리를 이기게 하심 곧 인격적 항복, 자발적인 순종을 하게 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로서 인격적 자발적 항복을 하는 삶을 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이기게 하는 사랑을 실천하기 바랍니다.
Share

 
 

번호 말씀제목 보기 본문말씀 설교자 설교일자 조회 추천
2533 [주일설교] 다시 걷기-변화된 삶으로!   롬12:1-2절 최용민목사 2026.4.5 104 0
2532 [주일설교] 주일1부실시간예배   롬12:1-2절 최용민목사 2026.4.5 14 0
2531 [특별새벽기도] 소망하기!(고난주간5) 롬8:18-25절 최용민목사 2026.4.3 46 0
2530 [특별새벽기도] 사랑하기!(고난주간4) 롬5:6-11절 최용민목사 2026.4.2 610 0
2529 [특별새벽기도] 한 걸음 내 딛기!(고난주간3) 잠16:1-9절 최용민목사 2026.4.1 497 0
2528 [특별새벽기도] 방향 묻기!(고난주간2) 시119:57-64절) 최용민목사 2026.3.31 660 0
2527 [특별새벽기도] 기억하라!(고난주간1) 시77:1-12절 최용민목사 2026.3.30 352 0
2526 [주일설교] 거룩한 멈춤! 집중!(고난주간) 시46:1-11절 최용민목사 2026.3.29 3580 0
2525 [주일설교] 주일1부실시간예배 시46:1-11절 최용민목사 2026.3.29 119 0
2524 [수요설교] 다시 세워진 신앙!(사사기강해15) 삿6:25-32절 임승철목사 2026.3.26 2144 0
2523 [수요설교] 수요예배실시간 삿6:25-32절 임승철목사 2026.3.25 108 0
2522 [주일설교] 신앙 성장과 습관(習慣)! 엡4:17-24절 최용민목사 2026.3.22 2308 0
2521 [주일설교] 주일1부실시간예배 엡4:17-24절 최용민목사 2026.3.22 124 0
2520 [주일설교] 주일2부실시간예배 엡4:17-24절 최용민목사 2026.3.22 162 0
2519 [수요설교] 원칙(原則)이 있는 신앙!(사도행전강해96) 행17:1-9절 최용민목사 2026.3.18 186 0
2518 [수요설교] 수요예배실시간 행17:1-9절 최용민목사 2026.3.18 228 0
2517 [주일설교] 신앙 성장과 결단! 왕하5:15-19절 최용민목사 2026.3.15 370 0
2516 [주일설교] 주일1부실시간예배 왕하5:15-19절 최용민목사 2026.3.15 179 0
2515 [수요설교] 위로받고 위로하고!(사도행전강해96) 행16:35-40절 최용민목사 2026.3.11 155 0
2514 [수요설교] 수요예배실시간 행16:35-40절 최용민목사 2026.3.11 257 0
 1  2  3  4  5  6  7  8  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