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삼하19:24-43절 사무엘하 강해22
제목 : 내 권리와 몫을 포기할 때!
성도들의 삶속으로
미국의 유명한 작가인 클레어 부스 루스라는 사람이 “누구의 인생이든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예를들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이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고, 다윗은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고, 바나바는 ‘위로의 사람’ 이라는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또, 미국의 16대 대통령인 아브라함 링컨은 ‘노예를 해방시킨 대통령’이라는 문장으로 요약이 될수 있고,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삼은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요약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라고 요약이 될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한국의 슈바이처, 한국의 성자로 불리우는 장기려 박사님이 떠 올랐습니다. 사람들은 이 분을 ‘아름다운 사람’ 이라는 문장으로 요약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장기려 박사를 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여겼을까요? 그분의 얼굴, 몸매가 좋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이 분은 외모적으로 뛰어나지 않습니다. 머리숱도 적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이 분을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아들인 서울의대 해부학교수였던 고)장기용교수는 ‘평생동안 자신의 편안함보다 남의 불편함을 먼저 염려하신 분’이라고 그 이유를 말했습니다. 예를들면, 수술비가 없어 수술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월급에서 수술비를 냈고, 자신의 집에 있는 쌀과 음식들을 가난한 환자들에게 갖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장기려 박사를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참 아름다운 사람들 곧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아 보인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모두도 아름다운 사람의 삶을 소원하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아름다운 사람
오늘 본문은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가운데 만난 3명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합니다. 먼저 24절을 보면, 귀환하는 다윗에게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이 찾아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이며, 다윗의 믿음의 친구였던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갓난아기 때 사울가문의 몰락으로 인해 도망치다가 떨어져 절름발이가 됩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왕이 된후 사울가문의 재산을 다 그에게 주었으며, 다윗의 아들처럼 왕궁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서 망명을 가게 될 때, 므비모셋의 종인 시바가 주인인 므비보셋의 재산이 탐나 므비보셋이 압살롬의 반역에 동참했다고 다윗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리고 속은 다윗이 시바에게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줍니다. 그런데 26-27절을 보면, 다윗이 시바가 거짓말을 했고, 자신이 므비보셋을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29절을 보면, 시바에게준 재산의 절반을 다시 므비보셋에게 돌려줍니다. 그 후 31절을 보면, 바르실래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찾아옵니다. 바르실래는 80세 노인으로 굉장한 부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망명을 갈 때, 다윗을 극진히 대접하고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33절에 바르실래에게 함께 환궁할 것과 큰 상을 줄 것을 말을 합니다. 그러나 34절을 보면 바르실래는 거절을 합니다. 그 후 요단강을 건넌 후 길갈로 가는 도중에 이스라엘 지파 사람 절반이 왕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왜 반역에 가담했던 유다사람의 도움으로 환궁하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러다가 43절을 보면, 유다지파 사람들과 이스라엘 지파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은,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답지 않은 사람’ 에 대해서입니다. 오늘 다윗의 환궁 가운데 3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첫째는, 므비보셋, 둘째는, 바르실래, 셋째는 이스라엘지파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3부류를 2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즉, 아름다운 사람과 아름답지 않은 사람입니다. 먼저 아름다운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므비보셋과 바르실래입니다. 먼저 므비보셋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므비보셋은 참 의리있는 사람입니다. 24절을 보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망명을 떠난 날로부터 옷의 모양도 내지 않고, 수염도 깍지 않고, 옷도 빨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망명의 아픔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실 얼마든지 압살롬의 편에 서서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사울왕의 후손이기에 얼마든 정치적인 제안을 할 수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므비보셋은 다윗의 아픔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바의 속임수로 모든 재산을 빼앗기는 억울함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억울한 누명이 풀렸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자신의 재산을 다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절반만 받았습니다. 얼마나 속상하고 화가 날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30절을 보면,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왕이 돌아왔으니 그거면 됐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다윗의 안위를 더 먼저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참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바르실래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극진히 대접한 바르실래에게 함께 왕궁으로 들어갈 것과 큰 상을 줄것을 제안했습니다. 얼마나 기분 좋은 제안입니까? 왕의 제안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가문의 영광이 될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5절을 보면, ‘어찌 누를 끼치겠습니까?’ 라고 그 이유를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늙은 자신이 함께 가는 것이 다윗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방해가 될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조건 OK이지요? 뭘 망설이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바르실래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르실래는 자신의 누릴 혜택보다는 다윗에게 해가 될 것을 걱정한 것입니다. 즉, 자기보다 다윗을 더 걱정한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았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셋째는 이스라엘 지파사람들은 지금까지 우리들이 살펴본 므비보셋과 바르실래와 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름답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다윗왕이 환궁하는 기쁨의 길에서 유다지파사람들과 다툼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툼을 일으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43절에 다윗왕을 환궁시키는 일을 의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의논해야 할 근거를 43절에 ‘우리는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라고 말을 합니다. 즉, 더 많고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의논하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의 모습은 결코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과연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좋았다고 하실까요? 아닙니다.
2.무슨 차이인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므비보셋, 바르실래는 참 아름다운 모습의 사람이었다는 점과 이스라엘 지파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사람을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고, 무엇이 사람을 아름답지 못하게 만들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다시한번 아름다운 사람으로 소개된 므비보셋과 바르실래의 모습에서 보여지는 공통점을 찾아 보도록 합시다. 무엇입니까? 바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주장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므비보셋은 시바의 속임수와 모함으로 재산을 전부 빼앗겼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억울함이 밝혀졌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빼앗긴 재산 전부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절반만 돌려주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소송, 고소..., 그러나 므비보셋은 자신의 권리, 자신의 몫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30절을 보면, 도리어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재산에 대한 절반의 권리와 몫조차도 포기하겠다고 까지 말을 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바로, 다윗을 위해서입니다. 바르실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르실래는 반역에 쫓겨 도망치던 다윗을 극진히 대접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도 다윗과 그와 함께 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상을 주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거절을 합니다. 마땅한 상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권리와 몫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35절을 보면, ‘내 주 왕께 누를 끼치리이까’ 곧 바르실래는 자신이 아닌, 다윗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통점은 나의 권리와 몫을 주장하지 않고, 나보다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면, 므비보셋과 바르실래의 모습과 반대의 모습이 보입니다. 43절을 보면, ‘왕에 대하여 열 몫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 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니냐’ 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열 몫’입니다. 즉, 자신에게도 왕을 데려올 권리가 유다지파 사람들보다 10배는 많다는 것이고, 왜 자신의 권리를 왜 인정하지 않고, 내 몫을 왜 주지 않았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이 받아야 할 몫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더나가서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는 내 유익이 먼저였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름다운 사람, 아름 다운 신자는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몫을 포기할 때’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자신의 권리와 몫을 포기하 않는다면, 결코, 아름다운 사람도 될수 없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인도 될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성경을 읽다가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많습니다. 그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주장과 권리와 몫을 포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들면,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조카 롯과 거주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당시 문화로 본다면 연장자인 아브라함에게 먼저 선택권이 있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자신의 권리와 몫을 포기했습니다. 또, 바울사도입니다. 그는 성경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을 합니다. 자신의 먹을수 있는 권리와 몫을 포기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그런 분입니다. 요1장을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의 권리와 몫을 포기하고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인간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권리와 몫을 포기할 때 아름다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므비보셋, 바르실래 역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몫을 포기할줄 아는 사람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낸 사람인 것입니다.
3.아름다운 신자가 됩시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도 므비보셋과 바르실래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바울처럼, 그리고 예수님 처럼,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자신의 몫을 포기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신자입니까? 아름다운 신자입니까? 아름답지 못한 신자입니까? 아름다운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을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여러분의 삶의 모든 자리에서 즉,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안에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내 주장, 내 권리, 내 몫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버릴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신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 몫과 내 권리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면, 결코 아름다움을 보이는 신자가 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나가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삶들 예를들면, 사랑하는 것, 용서하는 것, 감사하는 것, 섬기는 것, 희생하는 것, 겸손해지는 것, 대접해주는 것, 높여주는 것, 세워주는 것..., 이런 삶들을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삶은 우리들이 내 주장, 내 권리, 내 몫을 포기할 때 가능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의 첫발을 눅9:23절에서‘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결국, 우리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이유는 내 권리와 몫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정말 추하고 탕자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눅15장의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한 아버지에게 2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줄 유산을 미리 받아 다른 나라로 갑니다. 그곳에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돈을 다 허비하고 거지가 되어 돼지를 돌보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를 생각하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너무나 반가운 아버지는 이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살찐 송아지를 잡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를 배설합니다. 그때 1째 아들이 보고 아버지에게 불평을 합니다. 즉, 아버지와 함께 집안에서 일을 한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께 한 마리도 안잡아주고, 아버지에게 불효한 아들에게는 살찐 송아지를 잡아주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몫을 주장한 2째 아들을 탕자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집안에 있던 1째 아들도 탕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집에 일한 것에 대한 권리와 몫을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의 핵심은, 교회 밖에 있는 탕자도 있지만, 교회안에 있는 탕자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탕자의 특징이 ‘자신의 권리와 몫을 주장함’ 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탕자는 결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권리와 몫을 포기할 때,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릴 때 진정 아름다운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주장, 내 권리, 내 몫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먼저, 여러분이 내 권리와 몫에 대한 주장을 할수 있기 위해서는 손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손해가 아닙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된 여러분이 전부를 잃게 되더라도 여러분은 손해본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비록 손해를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채우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또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내 주장, 권리, 몫을 포기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라는 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내 권리와 몫을 포기하는 것이 비참한 일이거나, 치욕스러운 일이거나, 나약한 자가 되는 것이나, 바보 같은 일이 아니라, 도리어 최고의 가치가 있는 일이며 영광스러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일에 순종하지 못하는 많은 이유 중 중요한 이유는 그 일에 대해 가치를 두시 못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권리와 몫을 포기하는 것은 대단히 가치있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제자(그리스도인)가 된다는 것은, 주님의 종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종이 되는 것이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과 삶
1)주님은 우리들에게 므비보셋, 바르실래처럼 아름다운 신자가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2)다른 이들을 위해서 내 주장, 내 권리, 내 몫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3)내 주장, 권리, 몫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가치있고, 영광스러운지 알아야 합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서로에게도 하나님에게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요약될만한 복된 삶을 소원하며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