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호9:10-17절 호세아서강해25
제목 : 이스라엘의 배신!
성도들의 삶속으로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악한 배신자를 말하라면 가룟 유다를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21c가 시작되면서 가룟유다를 옹호하고 정당화하는 흐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들면,‘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는 잡지에서는 가룟유다야 말로 가장 진정한 제자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그 근거는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자신을 배신해 달라고 부탁했고, 유다는 원하지 않았지만 주님의 부탁을 받아 배신한 것이므로 가장 충성스러운 제자라고 주장을 한 것입니다. 또, 김동리의 장편소설 ‘사반의 십자가’에서는 가룟유다를 배신자가 아닌, 민족의 독립을 고뇌하는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또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에서도 유다를 원치 않는 일을 운명적으로 강요받은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이렇듯 21세기가 시작되면서 배신자 가룟 유다를 옹호하고 도리어 가장 의로운 행동을 한 사람으로 재해석하려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 이 사회가 갈수록 배신의 사회가 되어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배신을 지혜삼고 살아가는 시대이며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배신들을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유다의 배신 그리고 각 사람이 저지르는 다양한 배신은 결코 옹호될 수도 정당화 될 수 없는 것 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배신하는 일은 없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며, 또한, 배신하지 않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하나님의 사랑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배신을 꾸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전제 되어야 배신이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10절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라고 말을 합니다. 참고로, 원문에는 ‘옛적에’ 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족장시대와 출애굽 시대를 회상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포도를 만났다는 말은 우연히 만난나 것이 아니라, 찾고 찾던 중에 찾았다는 말이고, 특별히 광야는 물이 없어 건조한 땅입니다. 그런 그곳에서 포도를 만난다는 것은 대단한 기쁨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대단히 기뻐했다는 말입니다. 마치 잃었던 탕자를 다시 찾고 기뻐하던 아버지 같이, 또 잃은 드라크마를 찾고 기뻐했던 여인같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찾고 만나 대단히 기뻤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렇습니다. 첫 열매는 항상 큰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기뻐하셨고, 대단히 사랑했다는 말입니다. 또, 15절 ‘다시는 사랑하지 아니하리라’ 라는 말씀 속에서도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단단히 화가 나셨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해 분노하고 계십니다. 11절 ‘해산 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절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13절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15절‘내 집에서 쫓아내고.’ 16절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리라.’ 17절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 정말 무시 무시한 말이 등장합니다. 이것만 보아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얼마나 화가 나셨고, 분노하고 계신지 알수 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가운데는 ‘하나님께서 분노하셨다’는 말이 부담스러운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분노라는 것을 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분노한다면 그것은 죄일 확률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무리 분노하셔도 그 분노는 죄가 아닙니다. 도리어 이러한 화내심과 분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하나님이 분노하시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호세아서를 보면, 그리고 더나가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장면을 많이 소개합니다. 예를들면,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에게, 동생을 쳐 죽인 가인에게, 사람의 딸과 관계를 맺었던 노아시대 사람들에게, 소돔과 고모라 성 사람들에게,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없이 불평하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불순종한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왕정국가 모든 기간 동안 이스라엘 나라위에..., 등 하나님은 정말 많이 분노하셨습니다. 도대체 사랑으로 정의되시는 분이 분노하시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가 어떤 관계인가를 설명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분노는 언제하게 됩니까? 일말의 여지나 가능성이 있을 때입니다. 즉, 아직 포기하지 않았을 때 하는 것이 분노입니다. 예를들면, 이혼도장 찍기로 결심했는데 상대방의 실수에 화를 내고 분노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화를 내고 분노를 한다는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bc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시간이 조금 지나면 이스라엘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굳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크게 화를 내시고, 분노하실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비록 이스라엘을 향해서 분노하시지만, 그리고 멸망을 당하게 하시지만,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 그들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11:8절을 보면,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기로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가죽옷을, 노아시대 사람들에게는 방주와 무지개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선지자를...,이러한 모습이 바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표현이 분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세아서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우리를 향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때로는 화내심과 분노로도 사랑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사랑하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제 설명이 아닌, 성경의 구절들 소개함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 롬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또, 롬8:38-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이렇듯 하나님은 여러분 각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알고 확신하십니까? 혹시, 의심하는 분은 안계십니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원하는대로 해주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면 사랑을 의심하게 되고 안느껴지게 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현실, 상황, 결과물을 주시지 않으면 사랑을 의심하고 못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입니다. 왜냐하면,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확신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신앙의 큰 힘을 얻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당한 신앙의 내용을 만들어 낼수 있기 때문입니다.
2.이스라엘의 배신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당한 신앙의 내용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더나가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10절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즉, 하나님께 드려야 할 몸을 우상에게 바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배신입니다. 또, 15절 ‘그들의 지도자들은 다 반역한 자니라.’ 역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배신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17절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역시 이스라엘의 배신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없습니까? 없다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입으로 하나님을 부인한적이 없기 때문, 다른 종교를 가진적이 없기 때문, 주일을 어긴 적이 없기 때문, 정당한 헌금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 봉사와 수고의 일을 하고 있기 때문, 규칙적인 경건생활 곧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있기 때문...,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을 배신한 적이 없다고 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조금더 주의해 보십시오!
지금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을 배신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배신했다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 다양한 절기를 지키지 않았을까요? 율법을 읽지 않았을까요? 기도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다양한 제사와 제물을 드리고 있었고, 다양한 절기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신했다고 말씀하시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우상숭배일까요? 맞습니다. 분명히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또, 하나님이 아닌 다른 나라를 의지하는 것? 이것 역시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면, 이 2가지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배신했다고 분노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배신했다고 말씀하실 때에는 더 본질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하지 않음 입니다. 오늘 본문 어디에 그런 말이 나오냐고요? 이 점을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배신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심판(벌)을 내리신다고 말을 합니다. 그 심판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11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절 ‘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13절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14절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16절 ‘비록 아이를 낳을지라도 내가 그 사랑하는 태의 열매를 죽이라.’ 고 심판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심판으로 제시하신 내용들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자식과 관련된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생각하실 것입니다. 과연 자식과 관련된 심판과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은 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 그러면 신28:6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하늘의 별 같이 많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지 아니하므로 남는 자(자식, 후손, 인구)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자식과 인구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불순종이 극에 달했다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배신이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배신하지는 않았습니까?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순종을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루 하루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오늘 하루도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까? 만일 순종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을 외면하고 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왜 하나님께 대한 배신입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언약을 맺었습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하나님 노릇 잘해주겠다는 언약이고, 우리 입장에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겠다는, 즉,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앞에 순종하겠다는 언약인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난 그런 언약을 맺은 적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로한 그 자체가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순종은 단순히 하나님께 칭찬과 상을 받기 위한 수준 낮은 수단만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들에게 칭찬과 상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순종은 우리들이 기쁨과 감사로 마땅히 지켜야 할 수준 높은 의무이며 책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매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종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철저히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내기를 바랍니다.
3.순종의 신뢰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그리고 우리들이 순종의 삶을 살지 못하고 배신의 삶을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분명히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순종을 이성, 상식, 이해의 영역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내입장에 계산을 하기 때문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순종은 이성, 상식, 이해 그리고 계산의 영역이 아닌, 신뢰의 영역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을 신뢰 할 때에만 순종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순종은 신뢰의 싸움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순종하는 못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십니까? 더 구체적으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합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신뢰합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신뢰하십니까?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들에게 순종하지 못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실망시킨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100% 신뢰해도 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럴 때 순종의 삶이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본문과 삶
1)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답게 사랑하십니다.
2)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하나님 백성답게 순종해야 합니다.
3)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순종의 삶을 살아냄으로 배신이 없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