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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삶으로 확대되는 신앙! (호세아서강해14)
 본문말씀 : 호6:4-11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18.7.11
조회 : 9,577   추천 : 0  
본문 : 호6:4-11절   호세아서강해14
제목 : 삶으로 확대되는 신앙!   

  성도들의 삶속으로  
 성경은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특징들이 있다고 말을 말합니다. 특별히 마24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종말의 징조가 무엇인가를 묻고, 예수님께서 종말의 징조가 무엇인가를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종말의 징조는 무엇일까요? 7절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0절에 ‘서로 잡아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그리고 12절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사랑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또, 딤후3:1-4절에서 바울은 종말의 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하며’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이 나열하는 이 많은 내용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미움과 다툼을 일으키는 요소들이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을 하면, 사랑이 없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종말의 때가 가까울수록 사랑이 식어지고, 사랑이 없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나라의 종말이 가까워진 이스라엘 나라에도 사랑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랑이 없다는 꾸중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 신앙의 유익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사랑이 없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이 지적하는 북왕조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는 사랑이 없음입니다. 4절을 보면,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라고 말을 합니다. 즉, 인애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인애란? 인간에게 쓰여질 경우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충성됨을 말하고, 이웃을 향해서는 자비와 긍휼로 대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이 두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8절 이하의 구절을 보면, 특별히 이웃에 대한 자비와 긍휼 곧 사랑을 강조하는 단어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침 구름, 쉬 없어지는 이슬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쉽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사라진다는 것은 적다는 뜻이고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꾸중 받는 이유는 그들이 인애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르게 말을 하면, 그들은 사랑이 부족, 또는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8절을 보면, ‘길르앗은 악을 행하는 자의 고을이라 피 발자국으로 가득찼도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길르앗은 어디입니까? 길르앗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기업으로 얻은 요단 동쪽 땅입니다. 그런 그곳이 피 발자국으로 가득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유혈과 살인으로 얼룩진 땅이 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이 지역에서 수없이 많은 반역과 살인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또, 9절을 보면, ‘강도 떼가 사람을 기다림 같이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 길에서 살인하니 그들이 사악을 행하였느니라’고 말을 합니다. 세겜은 어디입니까? 요단 서편의 땅이며, 레위인의 땅이며, 도피성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제사장들이 약탈을 목적으로 순례객들을 살인하는 일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럴 정도로 제사장들은 탐욕과 잔인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5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또, 11절에 ‘또한 유다여 내가 내 백성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네게도 추수할 일을 정하였느니라.’ 곧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가장 우선적으로 지적하는 이스라엘의 죄는 ‘사랑이 없다’ 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사랑이 없다는 지적은 대단히 충격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사랑으로 정의되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나라이며, 사랑을 실천할 것을 요구받는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사랑이 있습니까? 어쩌면 이 질문은 오늘 우리 스스로에게 가장 심각하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사랑이 많은 성도입니까? 아니면, 사랑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성도는 아닙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이 없다는 말은 결코 들어서는 안될 말이고, 가장 수치스러운 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사랑으로 정의되는 신분, 사랑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가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사랑이 많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은 무엇일까요? 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을 착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착각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을 감정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만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고전13:4-7절을 보면, 분명히 알수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느니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15가지의 정의 중에서 우리가 사랑이라고 여기는, 보고싶음, 설레임, 콩닥거림, 안보면 미칠 것 같음...등과 같은 감정적인 내용들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사랑은 감정이 아닌 실천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15가지 정의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실천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약2:15-17절을 보면,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렇습니다. 배고프고 추운 사람들에게 배부르게 하라, 더웁게 하라고 말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위선입니다. 그래서 요일3: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라고 말을 합니다. 즉, 말만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서로를 유익하게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은 눅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말하려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감정일까요? 아닙니다. 강도 만나자 곧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도움을 줄수 있는 자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고전13장에서 말하는 15가지의 내용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사랑이 많은 신자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2.신앙이 삶으로 확대되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심판이 확정 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의 더 큰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과 삶을 구분한 것이고, 신앙을 삶으로 확대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 번제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와 번제가 왜 만족스럽지 않았을까요? 제물이 부족했을까요? 아니면 제물의 질이 떨어졌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의 신앙이 삶과 구분되어 있었고, 그러기에 신앙이 삶으로 확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여러 선지자들의 외침에서 더 정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사1:11-17절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어떤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오늘 본문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열심으로 드리는 제물, 그들이 열정적으로 모이는 다양한 성회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마음이 무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입니다. 즉, 제사, 번제, 절기라는 종교적인 행위에서 머물지 말고, 삶으로 확대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신앙과 삶이 분리되었고, 신앙에서 삶으로 확대되지 못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몇가지 종교적인 행위로 신앙 전체를 대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본문을 더 보겠습니다. 암5:21-24절입니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제사에 힘쓰지 말고,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라는 말입니다. 신앙이 삶으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 본문과 연관이 되어 있는 신약의 2개의 본문도 봅시다. 먼저, 마9:13절을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고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비난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비난을 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오늘 본문인 호세아서의 본문을 인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과 삶이 구별되었고, 신앙이 삶으로 확대되어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마12:7절을 보면, 오늘 본문을 한번 더 인용하십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먹었고, 그것을 바리새인들이 본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게 제자들이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을 했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오늘 본문인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안식일 신앙이 삶으로 확대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선지자들의 꾸중, 예수님의 꾸중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바리새인들은 신앙과 삶이 구별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신앙이고 삶은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더나가서 그들이 가진 신앙이 삶으로 확대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과 사람 앞에서의 모습이 천지차이일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미6:6-8절을 봅시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말을 합니다. 즉, 미가선지자는,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신앙과 삶의 일치이며, 신앙이 자신의 삶 구석 구석 확대되어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 호세아서의 지적이고 권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사랑이 없다고 책망받은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신앙과 삶의 분리, 신앙을 삶으로 확대해 가지 않음에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신앙과 삶이 구별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더 정확히 말을 하면, 신앙을 의식과 형식에만 국한 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쉽게 말하면, 신앙생활을 교회생활로만 여기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몇가지 봉사의 일을 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다 했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스라엘이고,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의 신앙과 삶이 연장선상임,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삶으로 확대되어가게 해야 합니다. 더 쉽게 말을 하면, 여러분이 가진 신앙으로 여러분의 인격을 고치고, 여러분의 성품을 고치고, 여러분의 스타일을 고치고, 여러분의 됨됨이를 고치고, 여러분의 말을 고치고, 행동을 고치고, 눈빛을 고치고, 여러분의 삶을 고쳐가야 합니다. 이것이 참다운 신앙인 것이고,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의 뜻입니다. 종교적 거룩을 삶의 거룩으로 확대하십시오! 종교적인 경건을 삶의 경건으로 확대하십시오! 종교적인 열심을 신자다운 삶의 열심히 확대하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삶속에 마주하는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확대하십시오! 더 이상 하나님이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을 예배, 헌금, 봉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3.왜 안되었을까?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신앙이 삶으로 확대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히 말을 하면, 이스라엘이 가진 신앙의 오해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은 신앙이라는 것을 ‘자기 의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은 신앙을 자기 의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을까요? 그것은 신앙을 단순히 어떠한 규칙, 규범을 지키는 것만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신앙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시하신 규칙이나 규범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는 것, 그래서 자기 의를 만드는 것은 신앙의 본질은 아닙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에게 지켜야 할 규칙이나 규범들을 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닮아가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신앙을 하나님을 닮아가기 보다는 주어진 규칙이나 규범을 잘 지키고, 그래서 자기 의를 만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의 신앙은 삶으로 확대될 수 없었고, 그들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삶으로 확장되어 가지 않고, 우리의 인격과 삶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신앙을 단순히 규칙이나 규범을 지키는 것만으로 이해하고, 더나가서 자기 의를 만드는 수단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바라새인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신앙의 본질은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하나님은 제사와 번제를 원하지 않습니다. 
 본문과 삶
  1)하나님은 우리들이 자신의 인격과 성품을 더 닮아가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2)즉, 신앙과 삶의 분리가 아닌, 신앙이 삶으로 확장되어가기를 원하십니다. 
  3)더 간단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신앙의 본질을 놓치지 말고,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인애와 아는 삶 곧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을 닮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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