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호4:15-19절 호세아서강해10
제목 : 말뿐인 신앙!
성도들의 삶속으로
얼마 전 삼성의 한 계열사 회사내 여직원들을 상대로 ‘직장 내에서 가장 꼴불견이라고 여기는 남성은 어떤 유형일까?’ 라는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4위는 술과 담배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고, 3위는 상사에게 무조건 굽실거리는 사람이었고, 2위는 반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1위는 어떤 사람일까요? 말이 앞서는 남자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직장여성들은 말만 하는 남자를 싫어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말만 하는 사람을 좋아 할리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도 말뿐인 신앙은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말뿐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북왕조 이스라엘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말뿐인 신앙!
오늘은 15절을 중심으로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너희는 길갈로 가지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지 말지어다.’ 라고 말을 합니다. 보시면, 하나님께서 북왕조 이스라엘에게 3가지를 금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는, 길갈로 가지 말 것, 둘째는,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 것, 셋째는,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말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3가지를 금지하시는 것을 통해서 알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북왕조 이스라엘이 길갈로 가고 있고, 벧아웬으로 올라가고 있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금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길갈로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길갈은 어떤 곳입니까? 수4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처음 진을 친 곳입니다. 특별히 이곳은 요단강에 있던 돌을 가져다가 기념비를 쌓았고, 이곳에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았으며, 유월절을 지켰으며, 신앙의 서약과 새 출발을 한 곳입니다. 즉, 신앙적으로 아주 의미 있는 곳입니다. 특별히 길갈에는 요단강을 건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었던 곳입니다. 그리고 기념비가 세워진 목적은 후손들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길갈의 비에 대해서 물어보는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이스라엘 사람들이 길갈을 찾는 목적은 우상숭배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하지만, 실상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벧아웬은 어디입니까? 벧아웬은 벧엘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그렇다면,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창28장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즉,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을 갈 때, 노숙했던 곳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뵈었고, 돌을 쌓아 기름을 부어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벧엘이 왜 우상의 집이란 뜻을 가진 벧아웬으로 불려지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왕상12장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솔로몬왕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이 됩니다. 그때 백성의 대표자들이 르호보암왕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해주길’ 간청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잘 왕으로 잘 섬기겠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르호보암 왕의 부친인 솔로몬은 성전공사와 왕궁공사와 같은 건설의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로인해서 백성들의 생활이 너무나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새롭게 왕이된 르호보암왕에게 아버지같이 하지 말아 주시길,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해주기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면 잘 섬기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르호보암 왕은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던 노인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 왕은 노인들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젊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더 강하고 무섭게 통치해야 한다고 말을 해줍니다. 그리고 이 말을 좋게 여긴 르호보암 왕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아버지 보다 더 강하게 통치를 할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결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잃었고 결국, 나라가 둘로 나뉘게 됩니다. 즉,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의 왕이 되고, 나머지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이 통치하는 나라는 유다(유다가 더 큰 지파였기 때문)를 국호로 사용하게 되고, 여로보암이 통치하는 10지파가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유다에 속에 있는 것입니다. 당시 성전은 여호와 신앙에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요, 신정국가를 상징하는 가장 큰 명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 절기마다 성전에 올라가야 되는데, 그렇게 되면, 나라의 정통성이 유다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왕은 성전을 대신 할 수 있는 성소를 만들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도록 한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벧엘과 단입니다. 명분은 가까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함이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지 위한 정치적인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때부터 벧엘이 벧아웬으로 불려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말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우상숭배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말라’ 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쉽게 예를들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하겠습니다. 라는 신앙의 서약, 또는 서원을 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참 귀한 신앙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신앙의 서약이나, 신앙의 서원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아무리 서약의 말을 하고, 서원의 말을 할지라도 안듣겠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만하지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길갈로 가지 말라,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말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말뿐인 신앙 때문입니다. 또는 마음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너희가 말만 그렇게 하고 실제는 아니지 않느냐?를 말하는 표현인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북왕조 이스라엘의 말뿐인 신앙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이사야서를 인용한다면, 사29:13절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Lip-Service 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뿐인 신앙은 호세아시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말뿐인 신앙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특별히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마23:2-4절을 보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말을 합니다. 주님의 꾸중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말뿐인 신앙은 야고보사도가 사역하던 시대에도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약2:15-17절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역시 말뿐인 신앙을 지적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역시 말뿐인 신앙을 가진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말로 신앙생활을 다하려고 하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사랑도, 용서도, 감사도, 섬김도.., 다 말뿐일 때가 참 많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예배에 나가는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보며 마음에 큰 감동을 받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가 도대체 새벽에 무슨 기도를 하는가 궁금해서 뒤를 따라 아버지 뒷자리에 앉아 아버지의 기도를 들었다고 합니다. ‘주여 가난한 성도들에게 쌀을 주시며, 병든 사람에게 고침을, 가난한 학생들에게 등록금을 주옵소서.’ 이 기도를 들은 아들이 감동을 받고 아버지를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금고에 숨겨둔 돈을 목사님에게 가져다주며,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을 한 가마씩, 그리고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는 입원비를, 그리고 가난한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을 주도록 드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안 아비지가 깜짝 놀랐고, 그 모습을 본 아들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기도를 내가 다 응답하여 드렸습니다.’과연 그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죽도록 맞았다고 합니다. 이 아버지는 말뿐인 신자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도 말뿐일 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뿐인 신앙의 모습 때문에 한국교회와 한국의 성도들이 늘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천국에는 목사의 입과 신자의귀만 가 있을 것이다’지금 여러분의 신앙의 모습이 말뿐인 신앙의 모습은 아닙니까?
2.삶을 원하시는 하나님!
그렇다면, 말뿐인 신앙을 지적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 원하시는 것은 말이 아닌,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삶을 요구’하시는 분입니다. 더 정확히 말을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 받을실 만한 삶을 원하십니다. 이 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이 아마도 창4장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일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을 낳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라면서, 가인은 농사하는 자, 아벨은 양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가인은 땅의 소산을 제물로한 제사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제물로 한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어떤 사람은 정성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제물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정성의 문제도 아니고, 제물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삶,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삶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거절 당한 가인이 화를 내자 하나님이 하신 말이 무엇입니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그렇습니다. 가인의 삶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즉, 가인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들통 나자 가인은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삶은 달랐습니다. 그래서 히11: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라고 말합니다. 반대로 말하면, 의로운 삶이 그의 제사를 더 나은 제사로 드리게 했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제사 또는 어떤 제물보다도 삶의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미가선지자는 미6:8절에서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것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삶을 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신약성경에서 더욱 분명히 들어납니다. 먼저, 마5:23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화목한 삶을 더욱 요구하시고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또, 롬12:1절에서도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 드릴 영적 예배니라’ 고 말합니다. 여기서 산 제사는 무엇입니까? 신선한 제물을 드리는 제사를 말합니까? 아닙니다. 살아가는 제물을 드리라는 말입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요구하시고 원하시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중요하게 여기십니까? 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내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하십니까?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참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과 원칙으로 삼고, 날마다 나를 고쳐가고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참된 신앙생활이란?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시한번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다양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삶에는 무관심한채, 여러분이 하나님께 요구할 것에만 마음을 빼앗겨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정말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임을 인정한다면, 여러분이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확신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살아가는 다양한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을 외면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만들어 가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열매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삶을 원하시는 이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삶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들에게 삶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삶이야 말로 모든 신앙의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는 증명,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명, 여러분이 천국이 있다고 확신하는 증명,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는 증명, 교회가 주님의 몸임을 아는 증명, 하나님이 마지막날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을 아는 증명..., 등 이 모든 신앙의 증명의 유일한 방법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보면, 여러분의 신앙과 신앙의 수준을 알수 있습니다. 삶이야 말로 가장 정확한 삶의 시금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랑거리는 만드는 신앙, 자기 만족을 위한 신앙이 아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만들어가는 신앙생활에 집중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삶을 요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과 삶
1)왜냐하면, 오직 삶으로만 우리의 신앙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그러므로 말뿐인 신앙은 안됩니다.
3)하나님은 여러분의 말(Lip-Service)에 속지 않습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매일이라는 시간속에서 자기 자랑, 자기 과기가 아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삶을 만들어 내는데 힘쓰고, 그 삶으로 신앙을 증명하시고, 그래서 주님 언제오시든 드릴 삶의 열매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