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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완강한 암소처럼!(호세아서강해9)
 본문말씀 : 호4:11-19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18.6.6
조회 : 8,425   추천 : 0  
본문 : 호4:11-19절  호세아서강해9
제목 : 완강한 암소처럼!   

  성도들의 삶속으로  
 옛날에 아주 관대한 마음을 가진 왕이 있었습니다. 이 왕이 얼마나 관대했냐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렀어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신하는 다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에게 용서를 받지 못한 신하가 한명 있었습니다. 그 신하가 용서 받지 못한 것은 그의 죄가 너무 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신하는 끝까지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왕과 같이, 아니 그 이상 관대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잘못이라도 용서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요일1:9절에 하나님은 어떤 죄라도 용서하실 수 있는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 이시고, 또한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용서를 명령하신 분이기 이전에 그 이상 용서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미쁘고 의로우신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하는 자를 용서하지는 않는 분이십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부린 북왕조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북왕조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내려지게 된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이스라엘의 죄 - 음행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지적하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음행’이라고 말을 합니다. 또, 12절에서도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또, 15절에서도 ‘이스라엘아 너는 음행하여도’ 라고 말을 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지적하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죄는 음행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북왕조 이스라엘의 음행을 2가지 음행으로 지적을 합니다. 첫째는, 영적인 음행 곧 우상숭배를 지적합니다. 12-13절을 보면,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의 우상이나, 자연숭배와 같은 다양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15절을 보면, ‘길갈로 가지 말며,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며’ 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길갈은 어떤 곳입니까?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처음 진을 친 곳입니다. 그리고 이곳에 요단강에 있던 돌을 가져다가 기념비를 쌓았고, 이곳에서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았으며, 유월절을 지켰으며, 신앙의 서약과 새 출발을 한 곳입니다. 즉, 신앙적으로 아주 의미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왜 길갈로 가지 말라고 말합니까? 그곳이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벧아웬은 어디입니까? 벧아웬은 벧엘의 또 다른 명칭입니다. 즉, 같은 장소를 벧엘, 그리고 벧아웬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을 갈 때, 노숙했던 곳이며, 그곳에서 하나님을 뵈었고, 돌을 쌓아 기름을 부어 그곳을 하나님의 집이라 불렀던 곳입니다. 그러나 벧엘이 벧아웬 곧 우상의 집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결국, 길갈이나 벧엘은 신앙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었지만, 결국에는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고 만 곳입니다. 이렇듯 북왕조 이스라엘은 심각한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육적인 음행을 지적합니다. 14절 ‘너희 딸들이 음행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온 이스라엘 남자와 여자 모두 육적인 음행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육적인 음행 역시 영적인 음행인 우상숭배(제의적 음행 – 신을 자극하기 위함)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당수 우상숭배가 육적인 음행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상숭배와 별개로도 육적인 음행도 만연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은 호세아서 앞부분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호1:2절을 보면,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나으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호세아는 3절을 보면,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삼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음란한 여자라는 말 때문에 고멜은 창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고멜은 창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디블라임이라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호1:2절 하반절을 보면,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 사람 모두 음란했고, 고멜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당시 북왕조 이스라엘은 육적인 음행도 만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분리 되지 않고,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다르게 말하면, 나의 신앙의 상태와 삶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생각, 말, 삶의 모습을 보면, 나의 신앙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결국, 북왕조 이스라엘에게 심판이 임하게 되는 이유를 오늘 본문은 ‘음행’ 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상숭배라는 말 대신 ‘음행’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먼저, 묻습니다. 음행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성적인 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행은 자신의 욕망, 자신의 욕구대로 사는 것을 말하고, 무엇보다도, 배우자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북왕조 이스라엘의 죄를 음행이라고 언급하는 이유는, 단순히 우상숭배라는 죄를 지적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내된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내된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리는 것일까요? 성전을 지어드리고 유지, 관리, 보수하는 것일까요? 다양한 종교 의식을 행하는 것일까요? 고작 이런 것은 아닙니다. 다르게 묻습니다. 남편을 향한 아내의 의무와 책임은 무엇일까요? 밥해주고, 빨래해주는 것 일까요? 그건 아내가 아니라 가사도우미지요. 그러면 아내의 의무와 책임은 무엇입니까? 엡5:22절에는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복종, 순종으로 표현되는 사랑을 하라는 것이고 그것이 아내의 의무고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내가 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아내로서의 의무와 책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왕조 이스라엘은 다양한 종교적인 의식을 행하기를 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고발이 무엇이었습니까? 사29:13절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음행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음행이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이 혹시,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멀어진 자들은 아닙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몸으로는 종교적인 일에 열심을 내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은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게 우상숭배이고, 그게 음행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을 회복하고, 놓치지 않고, 그 무엇보다 가장 소중히 여기기를 바랍니다. 

  2.죄임을 깨달지 못함.
 우리는 지금까지 북왕조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곧 음행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북왕조 이스라엘이 저지른 우상숭배와 음행보다 더 심각한 죄가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그들은 그것들이 죄라는 사실을 깨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 고 말을 합니다. 즉, 우상을 숭배하는 일, 음행하는 일이 죄임을 깨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어떻게 우상숭배를 하면서 어떻게 죄인 줄 모를까? 또, 음행을 저지르면서 어떻게 죄인 줄 모를까? 라고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인간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2가지로 설명하겠습니다. 첫째는, 인간은 죄성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죄에 대해 합리화 정당화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왕상13장을 보면, 솔로몬 통치 말년에 이미 이스라엘에는 굉장히 많은 우상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땅 여기 저기에 우상을 위한 제단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과 백성들은 죄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우상들은 종교와 신앙의 문제가 아닌, 정치와 외교의 문제라고 정당화 합리화 했기 때문입니다. 출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애굽땅에서 나오고,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척박한 환경, 그리고 지도자 모세의 부재로 인해서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 금송아지가 우상숭배이고, 죄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그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정당화 합리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숭배하면서 죄라고 여기겠습니까? 이렇듯 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 하고자 하는 성향이 모든 인간에게 있고 그 결과 그것을 죄라고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혹시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가 죄를 정당화 합리화 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예를들면, 이래서 저래서... 이것 때문 저것 때문..., 등 저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셔서,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회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죄의 기준 때문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며, 음행을 저지르면서도 죄라고 깨달지 못한 본질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상숭배와 행음을 죄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 모두가 그랬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죄이지만 우리들이 죄로 여기지 않는 것들 대부분은, 많은 사람들이 다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들입니다. 예를들면, 험담, 거짓말, 욕심, 화를 내는 것...,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일들은 죄 임에도 불구하고 죄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들을 근거로 말한다면, 음욕을 품는 것, 미워하는 것과 같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은 죄라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음욕도, 미움도 죄이다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이 땅을 살면서 죄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갖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를 깨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에 대한 올바른 기준은 무엇입니까? 첫째,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지금까지 죄라고 여기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죄임을 깨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이 너무나 큰 은혜이고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죄를 깨닫게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누리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풍성하게 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3.암소같이 고집을 부림
 우리는 지금까지 북왕조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첫째는, 음행이라는 죄이고, 둘째는, 그 죄를 깨닫지 못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완강한 암소처럼 고집을 부린 것입니다.’ 오늘 16절에서는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북왕조 이스라엘을 완강한 암소와 같다고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단지 그들의 성향과 그들의 스타일일을 지적하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우상숭배와 음행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시고, 그들이 그 죄를 중단하기를, 그리고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선지자들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주인이 이리 저리 이끌어도 따라가지 않고 서서 버티는 고집 센 암소와 같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집이 결국, 북왕조 이스라엘을 망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집은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고집이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사건은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감사의 사건이지만, 애굽사람의 입장에서는 비참한 역사의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애굽 온 땅이 10가지 재앙이 내려지게 되었고, 그 재앙으로 인해서 온 땅이 황폐하게 되었고, 많은 가축들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애굽 땅의 모든 초태생(사람, 짐승)이 다 죽었고, 그래서 애굽 사람을 고아와 과부로 만들었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애굽 군사들이 홍해바다에서 수장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비참한 역사가 생긴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왕 바로의 완고함, 곧 고집 때문입니다. 또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향해 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집을 부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혹시, 고집 센 암소는 아닙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내 삶을 고집 하고, 내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내 생각을 고집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고집하고, 내 계획을 고집하고, 내 스타일을 고집하고...등  그렇다면, 여러분은 더럽게 고집센 암소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믿음과 신앙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믿음 또는 신앙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인 것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가지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이 참다운 믿음일까요? 아닙니다. 반응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렇듯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께 대한 반응을 믿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며 사는 것입니다. 또, 믿음과 신앙의 수준의 시금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의 정도, 수준이 결국은 믿음과 신앙의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영적인(신앙적인) 고집불통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고집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일에 조금 더 노력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우리는 여전히 연약한 자들입니다.
 본문과 삶
  1)그래서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2)그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3)무엇보다도 그 죄된 것을 고집하면 안됩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완강하고, 강퍅한 암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늘 순종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복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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