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13:1-2절 고린도후서강해69
제목 : 권징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잘못에 대한 올바른 꾸중과 징계였다고 합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 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꾸중, 징계, 권징은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엄하게 권징할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권징의 필요성과 권징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배움으로 신앙의 유익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교회안에는 권징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3번째 방문을 할 것을 예고하는 내용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당시(행18장) 고린도교회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1년 6개월간 고린도교회와 함께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1차 방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이후, 2차 방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 방문에서 바울은 심적으로 어려움을 격게 됩니다.(고후2:1절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고후2:5절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그리고 이제 3번째 방문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고린도교회에 방문하는 것은 2번째 방문과 사뭇 다를 것임을 예고합니다. 예를들면, 2번째 방문의 때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경고하는 정도였다고 도리어 그들에게 냉대를 받았던 방문이었다면, 이제 3번째 방문해서는 죄 지은 자들에 대해서 엄중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을 보면,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라는 신19:15절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즉, 소송이나 재판에서는 반드시 증인의 말을 근거해야 한다는 구절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3번째 방문하는 것은 이런 죄에 대한 책임을 분명하게 묻겠다는 대단히 강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3번째 방문은 아마도 3차 전도여행 가운데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행20:1절) 결국,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3번째 방문의 목적이 단순한 권면이 아닌, 권징이나 징계를 목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첫 번째로 묵상할 주제는, ‘권징, 징계, 또는 꾸중의 필요성?’ 에 대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안에는 권징(죄에 대한 지적, 경고, 책임 물음)이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적극적으로 말하면, 교회의 순결과 거룩함을 지키기 위함이며, 소극적으로 말하면, 실수가 없고, 완전한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좀 직설적으로 말을 하면, 신앙은 오냐 오냐 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다르게 말하면, 교회를 다스리고,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중단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꾸중이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는 실수가 많고, 완전하지 못하고, 연약하고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를 갱신시키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여전히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기복주의 신앙이라니, 교회가 물량주의에 빠졌다느니, 세속적이며, 세상과 다르지 않다니, 교회가 왜 그러냐? 예수 믿는 것들이 왜 그 모양이냐? 등의 비난의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가슴 아픈것은 그러한 비난의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을 향해 그건 오해고 다 틀린 말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비난 받을 만한 그리스도인,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할만한 교회의 모습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에 존경과 칭찬을 받아야 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비난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말한다면, 교회의 표지중 하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표지라는 말은 ‘교회의 교회 다움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3가지를 말합니다. 첫번째는 올바른 말씀의 선포, 둘째는, 거룩한 성례(성찬과 세례)의 시행, 셋째는, 권징 곧 죄에 대한 지적과 책망, 그리고 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기독교헌법에도 권징이라는 조항이 있다. 수찬금지, 직분정지, 출교) 이중 이 시대의 교회가 가장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권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징이 실행이 되지 않기 때문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다움을 잃고 비난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안에는 권징 곧 꾸중함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권징이라는 표지, 헌법대로 시행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카톨릭처럼 이 땅의 교회가 조직과 체계를 갖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교회를 떠나면 자유롭게 다른 교회에 등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교회는 권징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마18:15절 이하를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다음은 2-3증인을 세워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벌주고, 쫓아내는 것을 목적하는 권징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권징의 목적은, 권징을 통해서 성도들이 잘못은 인식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세우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점은 좀 전에 살펴본 마18장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15절 ‘네 형제를 얻을 것이요’ 즉, 권징과 꾸중을 통해서 범죄한 사람이 죄를 깨달고, 회개하고, 올바르게 신앙이 세워지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권징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모든 교회 역시 권징을 시행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랑하는 교회안에는 아직 권징이 시행된 적이 없습니다. 권징에 대한 생각이 드는 순간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권징이 필요한 사안이면 권징이 시행될 수 있도록 저와 교회를 위해서 기도바랍니다. 그리고 그때까지는 여러분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 곧 설교 시간을 권징의 시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서 위로가 주어지고, 소망도 주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는 권징이어야 하고, 꾸중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설교시간마다 권징의 시간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2.서로 꾸중하고 꾸중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또, 교회가 교회를 권위를 가지고 성도들을 권징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안에서 권징이 시행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 방법은 무엇입니까? 잘못하지 말고, 실수하지 말고, 완벽하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그럴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서로 꾸중하고 꾸중을 받을 줄 아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마18장의 원리)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서로를 꾸중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이며, 책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꾸중의 이유와 목적을 놓치면 안됩니다. 다시 묻습니다. 꾸중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유익을 위함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이 이유와 목적 말고는 다른 이유와 목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안에서 행해지는 꾸중의 이유와 목적이 잘못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2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예를들면, 너 왜 그렇게 밖에는 못해~ 이 말 속에는 난 잘났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또, 너 틀렸어~ 라는 말속에는 난 잘 안다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왜 안해~ 라는 말속에는 난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한 이유와 목적으로 꾸중이 행해져서는 안됩니다. 또한, 둘째는, 마음에 안들어서 하는 분풀이일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말해, 상대방을 위한 꾸중이 아니라, 단지 내 마음에 안들어서, 그리고 화가나서 분풀이로 하는 꾸중입니다. 만일 이런 이유와 목적을 위한 꾸중이라면 차라리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이러한 꾸중은 상대방에게 조금의 유익도 주지 못하고, 도리어 신앙의 해를 끼치는 꾸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꾸중은 상대방을 실족하게 하고, 신앙이 주저앉게 하고,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에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위한 사탄의 계략으로 즐겨 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꾸중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꾸중입니다.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군가를 꾸중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상대방을 향하여 안타까운 마음이 있는지 점검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지금 내가 울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올바른 꾸중으로 상대방의 신앙에 유익을 주고, 세워주는 꾸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의 유익을 위해 꾸중을 할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여러분은 꾸중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훌륭한 신자는 어떤 신자입니까? 그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잘못을 꾸중할 때, 자신을 잘못을 인정하고, 꾸중을 겸손히 받아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꾸중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어떻습니까? 누군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꾸중하면 기분 나빠합니다. 그리고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더 심한 경우는 나의 잘못을 꾸중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공격합니다. 이것이 보통 꾸중을 받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꾸중을 기분 나뻐 하지 않고, 겸손히 받아 들이는 분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잘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난 한 달을 살면서 누군가가 여러분을 꾸중한 일은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여러분은 꾸중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도 여러분을 꾸중한 적이 없다면, 여러분이 완벽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꾸중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도 여러분을 위해서 꾸중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확인이 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꾸중을 받을 줄 아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꾸중을 받을 줄 아는 사람과 꾸중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먼저, 꾸중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은 누가 있습니다. 바로 다윗왕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했고, 그 가운데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이자 충신인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때, 나단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다윗의 잘못을 꾸중했습니다. 그때 삼하12:13절을 보면, 다윗은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꾸중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 또, 히스기야왕입니다. 히스기야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민족에서 위문사절단이 찾아옵니다. 그 중에는 바벨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 나라안에 있는 값진 것들을 다 보여주게 됩니다. 교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선지자가 찾아와 히스기야왕의 잘못을 꾸중하고 유다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그때, 히스기야왕은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나이다’ 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꾸중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꾸중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사울왕입니다. 어느날 하나님은 사울왕에게 아말렉과의 전쟁을 할 것과 승리 할 것, 그리고 모든 전리품을 남겨두지 말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아말렉왕과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끌고 왔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선지자 사울을 찾아가 꾸중을 합니다. 그때 사울왕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라고 핑계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이 다시한번 꾸중하자,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끌고 왔나이다’라고 또 핑계했습니다. 결국, 이일로 인해서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꾸중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을 이들을 호되게 꾸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꾸중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꾸중을 받아 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꾸중을 받아야만 하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꾸중을 받아 들이때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게 되어간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꾸중을 할줄도 알고, 여러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꾸중하는 자를 존경하고, 꾸중을 감사히 받는 겸손한 성도가 됨으로, 여러분 모두가 함께 신앙이 성장하고 온전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3.순결과 거룩, 온전함을 사모하는 마음
이제 여러분을 향해서 꾸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너무나 소극적이고 게으릅니다. 여러분은 인격과 교양이 너무 부족합니다. 그리고 너무 교만합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너무나도 무례합니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한 열심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입에 달고 살지만 너무 사랑이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복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삶이 편해지기만을 바라지, 신자로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소홀합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가장 꾸중을 받아야 할 것은,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 사람으로 안삽니다. 쉽게 말하면, 신앙과 삶이 너무나 불일치 합니다. 매번 말뿐입니다. 믿음과 행함, 말과 행동이 너무나 다른 이중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개하십시오! 고치십시오! 어떻습니까? 꾸중을 받아드리시겠습니까? 못 받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서로 꾸중하고 꾸중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순결과 거룩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고 자는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누구도 온전하게 꾸중하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누구에게도 꾸중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순결과 거룩을 사모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기꺼이 꾸중을 할 수 있게 되고, 꾸중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더나가서 서로에게 ‘나 어디가 틀렸어?’ ‘내가 뭘 고쳐야 할까?’ 라고 묻게 될 것이고, ‘날 좀 지적해 주십시오!’ 요청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꾸중하는 설교가 선포되어 질 때, 여러분은 비록 마음은 찢어지고 탄식하게 되겠지만, 행복할 것입니다. 순결, 거룩, 온전함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권징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본문과 삶
1)교회가 권징의 시행이 있도록 기도바랍니다.
2)그러나 교회가 권징을 시행하기 이전에 여러분이 서로를 꾸중하고, 꾸중을 받는자가 되십시오!
이것은 서로에 대한 의무이며 책임입니다.
3)순결, 거룩, 신자로서의 온전함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으십시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그래서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더 나은 교회, 더 나은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져 가지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