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
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절-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
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절-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
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오늘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 말씀은, 바울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간구하는 기도의 내용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바로 앞의 16절에, 바울이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라고 하였는데, 문자적으로는 “내 기도에 너희를 기억한다”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은, 경건한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날마다 일정한 시간을 떼어 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서너 시간씩 기도했는데, 사도 바울도 날마다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교회를 위해 기도할 수 있었고,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서신에서 “내가 기도할 때마다 너희들을 기억한다”고 말했는데, 그가 성도들을 위하여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겠습니다.
그가 성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던 그 기도는, 성도들의 사업을 위해서라든가, 성도들의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든가, 성도들의 생활을 위한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목회자로서 이러한 기도도 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소개하고 있는 바울이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는 그 기도는, 바로 성도들의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성도들의 “영적인 건강”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구체적으로 4가지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이 4가지의 영적 진리를 깨닫고, 알게 하시기를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그 4가지의 영적 진리를 하나씩 살펴볼 텐데, 오늘은 2가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하여금 여러분에게 알게 하시는 진리를 깨닫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17절).
바울은 17절 말씀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고 하였는데, 여기 “지혜와 계시의 정신”에서 “정신”이라는 단어는 “성령”을 가리키는 헬라어입니다. 즉,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란 바로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라고 했는데, 바울에게 있어서 “지혜”라고 하는 단어는, 종종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그 일이 신자들에게 가져오는 유익을 이해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그 하나님의 구속 사업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이며, 이 지혜를 바로 “성령님”께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계시의 정신”이라고 했는데 이 “계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드러내시고 나타내신 것, 다시말해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영적인 은사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이 “계시”를 오로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제한된 것으로 보지 않았고, 오히려 이 성령님을 통한 계시는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또한 우리가 어떻게 그 빛 안에서 살아갈 것인지를 알도록 성령님을 통해 계속해서 주어진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 17절의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지혜와 계시의 성령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책으로 배우듯이 지식적으로 안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친구나 가족을 서로 잘 알듯이,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TV를 통해서 연예인들을 보게 되고, 또 그들에 대해서 많이 알고 많은 지식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단편적인 지식, 단편적인 관계이지 인격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누구나 다 대통령과 인격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에 나오는 윤시윤을 직접 만나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친밀하게 교제를 나누게 되는 사이가 되는 것은 TV를 통해서 아는 윤시윤하고 너무도 다른 지식입니다. 오히려 TV를 통해서 아는 지식보다 더 깊은 지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윤시윤과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식사를 하며, 예배를 같이 드리며 찬양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쁘고 생동감이 있겠습니다. 이런 관계를 우리는 윤시윤과 인격적인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윤시윤을 인격적으로 모르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 윤시윤 그 친구 내가 잘 알지~”하면서 그 사람에게 윤시윤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자리에 윤시윤은 없지만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 서로가 서로를 윤시윤처럼 생각하고 대한다면, 우리 교회의 모임과 성도들의 만남은 활력이 넘쳐나고, 기쁨과 웃음이 넘쳐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이런 운동을 해야겠습니다. “성도님 당신은 윤시윤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우리가 윤시윤과 인격적 관계를 맺었다 가정했을 때 우리는 참으로 기쁠 것인데, 그 윤시윤의 자리에 윤시윤을 빼고 하나님이 본래의 자리로 들어가신다면 우리는 어떨 것 같습니까? 매 항상 드리는 예배, 멀고 추상적으로만 생각하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우리의 모습에는 기쁨도, 활력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인격적 관계로 대하지 않을까요?
아까도 말했듯이 내 삶 속에 같이 살아가는 아버지, 어머니처럼 가까이 계시는 분으로 여기지 않을까요?
내 마음에 활력을 주며, 생동감을 주는 윤시윤으로 대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향한 사모함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윤시윤을 좋아하고, 윤시윤에게 관심 있는 마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윤시윤을 만났을 때 기쁨과 활력은 충분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에게 관심 있는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온 우리는 당연히 기쁨과 활력이 있겠죠.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멀게만 생각하며, 눈에 보이는 윤시윤으로 생각지 않고 추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와 인격적으로 관계를 맺은 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게 해 주신다고 했는데,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게 해주시는 성령님조차도 아직 모르고 있고, 만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 신랄하게 우리는 성령님을 만나지 않으려 애써 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다고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태어나게 하신 부모님이요, 나를 먹여 살리시는 아버지요, 때를 따라 밥을 차려 주시는 어머니로 가깝다 못해 내 생활 속에 함께 있는 어머니로 알고 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부모님에게 가까이 나아가지 않습니다.
어머니 되시는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선택하사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지혜와 계시의 성령님”께서만이, 알게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간구한다는 바울 사도의 말을 듣고, 우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하나님 알기를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에 대해 들어도, 또 아무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싶어도,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성경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믿고 싶어도, 사람의 힘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 누구나 볼 수 있게 나타나신다면, 아마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에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마음”은, “생각”, “의지”, 또는 “영”의 뜻을 가지는 단어입니다. 이 마음의 눈을, 성령님께서 밝혀주셔야, 우리가 볼 수 없는 걸 볼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믿도록 역사해주신 성령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우리가 전도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가족들과 자녀들, 친구들과 이웃들을 위해서 이 사도 바울과 같은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전도할 수 없고, 그들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님을 그들에게 보내시사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식하는 자가 되기를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임을 알게 하신다.
18절에 우리로 하여금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임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르심”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선택” 또는 “예정하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하나님의 주도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소망”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역사 속에서 이루실 것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소망”은 그저 연약한 희망이 아니라, 아주 확실한 소망인데, 그 이유는, 이 소망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셨고, 그의 자손 중에서 야곱을 선택하여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주셨고, 그의 후손들로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비록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고, 결국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내가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브라함에게 이 소망은 어쩌면 희미하고 멀게만 느껴지는 소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소망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본문의 이 “소망”은, 바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을 바라는 소망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이미 구속이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이 구속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신 것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선택하사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힘입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까지 인도하신 것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확실히 저 천국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주어질, 구원의 완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자들로 하여금, 이러한 확실한 소망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한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완전한 구원으로 확실히 인도하실, 하나님의 부르심의 확실한 소망을 알게 되면, 우리가 비록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 있든지, 광야 생활을 하고 있든지, 결국은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주실 확실한 소망으로 인하여, 기쁨 가운데 살 수 있고, 현재의 상황으로 인하여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면, 우리는 보지 못하던, 확실이 여기지 못하던 미래의 확실한 소망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의 생활도 하였고, 또 40년 동안 광야에서 떠도는 생활도 하였지만, 그 광야의 훈련을 통하여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으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히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불러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저 천국을 확실히 허락하실 것이라는, 그 확실한 부르심의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말고, 늘 기뻐하면서, 환경에 지배를 받지 않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늘 신자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신자들을 위하여 늘 기도하는 내용은, 그들이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더욱 깊이 알게 되고, 우리로 하여금 부르심의 소망을 이해하고 그 소망을 확실히 여기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생활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윤시윤이 아닌 나를 먹여 살리시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 때를 따라 밥을 차려 주시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이 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