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12:5-10절 고린도후서강해65
제목 : 약한 자가 되십시오!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여러분은 ‘지는게 이기는거다.’ 라는 말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졌는데 이겼답니다. 말에 어폐(語弊)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옳은 말입니다. 어떤 측면에서 옳은 말입니까? 이겨먹는 것보다 져주는 것이 더 높은 수준이라는 측면에서 옳은 말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이라는 좀 어폐(語弊)가 있는 말씀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 여러분 모두가 약한 자로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하나님의 종된 증명은 고난이다.
우리는 지난 시간 바울이 경험한 신령한 체험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자신이 경험한 신령한 체험을 소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함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신령한 체험을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됨의 근거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거짓사도들에게 현혹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문과 연관해서 말하면, 그들이 확인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들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난 뭘 보았다, 뭘 경험했다..., 이러한 신령한 체험을 근거로 자신들의 사도권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도 거짓사도들 못지 않은 신령한 체험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신령한 체험을 말하는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령한 체험을 하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계시’(1,7절)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들이 신앙생활 가운데 어떤 신비한 체험, 신앙적인 체험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임을 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즉, 어떤 현상을 따라가는 신앙이 아닌, 계시 말씀을 따라가는 신앙을 갖어야 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바울이 경험한 신령한 체험과 연관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6절부터 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신령한 경험들을 자랑해도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자랑하는 모든 것들이 누구처럼(고린도교회안의 거짓사도들) 거짓이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진실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랑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곡해되거나, 유혹과 시험의 도구가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5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만을 자랑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이 말도 어폐가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약한 것은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세상에서는 약한 것은 감추고 숨기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만을 자랑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자랑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7절을 보면,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자랑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육체의 가시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육체의 질병을 말합니다. 아마도 안질이거나 간질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무엇이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육체의 질병으로 인해서 바울은 사역의 어려움을 격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육체의 질병을 고쳐주시길 3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9절에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라고 거절하셨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바울은 9절에서 자신의 약한 것으로 인해 크게 기뻐하게 되었고,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0절에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 고백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은 신령한 체험을 많이 한 사람이고, 계시 곧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사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문제를 다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도리어 10절을 보면, 육신의 질병, 능욕, 궁핍, 박해, 곤고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점은 고후11:23-30절을 보면, 더욱더 자세히 소개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증명이 ‘고난’ 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종이라는 증명이 고난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라도 편에만 서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종이 보냄 받은 곳은 어디입니까? 이 세상이고,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고난이 주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이사야, 예레미야, 스데반, 예수님...,등)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종, 사도됨의 증명을 고난으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안에 침투한 거짓사도들은 고난이 아닌, 영광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고전11:20절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빰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가.’ 즉, 높아짐, 권세를 부림, 욕심을 냄, 자기 마음대로... 고난이 없는 이들은 참다운 사도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종된 중요한 증명은 고난입니다. 그렇다면, 참 신자의 증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역시 고난입니다. 이 말은 결국,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특별대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앙이 좋다고 해서, 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런 식의 만사형통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예로 들면, 하나님 아프니까 고쳐주세요 한다고 다 고쳐주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힘드니까 해결해 주세요 한다고 다 해결해 주시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는, 고난과 시련을 피해가게 해주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필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신앙의 특별대우는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측면의 만사형통은 있지만, 무슨 일이든 다 잘되고, 바라는 것은 다 이루도록 해주신다는 측면의 만사형통은 없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신앙의 특별대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더 잘 하기를 원한다면 이런 잘못된 생각을 깨트려야 합니다. 둘째는, 참다운 신자로 사는 자에게는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딤후3:12절을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말씀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 편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죄의 본성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신자로서 고난이 있습니까? 대답하기가 막막할 것입니다. 그럼 단어를 조금 바꾸어서 묻습니다. 여러분은 신자로서 손해 보는 것이 있습니까? 억욱함, 답답함, 속상함, 한숨, 희생..., 등 이러한 것들이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참다운 신앙의 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의 정도를 가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는 지금 여러분의 신앙생활속에 고난이 있는지를 확인하시면 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왜곡된 특별대우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참된 신자의 증명인 고난이 있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2.하나님의 종된 증명은 약함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종된 증명이 고난이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하나님의 종된 증명을 ‘약함’ 이라고 말을 합니다. 5절에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9절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 10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 여러번 약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약함은 무엇일까요? 몸이 약하다는 것입니까? 생각과 마음이 약하다는 말입니까? 영혼이 약하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약함은 겸손함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온유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7절에서‘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온유함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보통 신자들은 온유함을 인격이나 성품적 차원에서 생각을 합니다. 예를들면, 화낼 줄 모를 정도로 인격이 좋은 사람, 성품이 차분하고 부드러운 사람, 세상적인 표현을 빌려 쓴다면, 법 없이도 살 사람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함이란 인격이나 성품 또는 기질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성경은 모세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모세의 성격을 생각해보십시오! 모세의 기질울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한 사람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꽤 혈기도 있어 보이고, 기질도 강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또, 스스로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특별히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을 향해서 하셨던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하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생각하는 그런 온유한 모습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구약성경에 나오는 온유라는 단어의 어원이 ‘압제당하다.’입니다. 즉, 소극적으로 말을 하면, 스스로를 보호하거나 변호할 힘이 없는 상태를 말하고, 적극적으로 말을 하면, 그래서 하나님께 피할 수 밖에 없는 자, 하나님을 붙들 수 밖에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온유라는 의미가 신약 성경에도 같은 맥락으로 사용이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5장을 보면, 팔복이 나옵니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리고 세 번째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난, 온유라는 말은 모두 ‘압제당하다’ 라는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라는 점입니다. 즉, 심령의 가난과 온유함은 같은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개인의 문제로 인한 압제를 말하는 것이고, 온유함은 타인으로 인한 압제를 근거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압제에 대한 태도는 같습니다. 즉, 하나님께 피하고, 붙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을 온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과 신약 성경이 말하는 온유라는 말은, 스스로의 약함을 인식하고,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감당하거나,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호소, 의뢰, 의지하는 자 곧 자신을 자신의 힘으로 보호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힘을 삼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찾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으로 모세를 모십시오! 그가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은 이후 그는 줄곧 하나님만을 힘과 도움으로 삼고 의지했습니다. 예수님도 보십시오! 하나님의 종으로서 철저히 하나님을 힘과 도움으로 삼고 의지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예수님이 온유한 분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이 말하는 약한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도움과 힘으로 삼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야 말로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을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약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당장 어떤 보상과 보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약한자가 되는 것은 누구보다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신자로 만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즐겨 쓰시는 방법이 고난의 자리에 우리를 놓아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내 손으로 할수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하나님을 안찾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고난을 격게 하시고, 그래야 우리들은 비로서 하나님께 손을 내밀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약한자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신앙이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고난의 자리로 이끌리기 이전에 스스로 약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의 자리로 나가기 전에 스스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참된 하나님의 사도됨의 증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약한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참된 신자됨의 증명은 무엇입니까? 그것 역시, 약한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나게 되고, 강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강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약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약한 자가 되십시오! 약한 자로 살아가십시오! 이러한 약함은 우리 모든 신자의 책임이며, 신앙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것입니다.
3.하나님의 평가가 가장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참 사도됨의 증명 2가지로 보았습니다. 첫째는, 고난이며, 둘째는, 약한자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고난이 있는 삶, 그리고 약한자가 되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해서입니다.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로, ‘사람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고난이 있는 신자의 삶을 망설이는 이유, 무엇보다도 사람들 앞에서 약한자가 되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사람을 의식하고, 사람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을 하면,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평가보다는 사람들에 대한 의식과 평가에 더 귀를 기울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 강한자로 보여지고, 강한자로 평가되고, 강한자로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고난이 있는 삶, 약한자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와 시선을 의식해서 더 나은 신자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어떤 능력이 있는 자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전혀 신앙의 능력이 없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난, 약한자의 삶을 살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평가에 더 귀를 기울였고,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고전4:3절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자는 세상에서 평가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르게 말하면,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받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기준으로 하나님에게 평가받는 사람입니다. 그 기준은 고난과 약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의 상주심만을 바라는 여러분이 되어서 신자됨의 증명이 고난과 약한자의 삶을 살아내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지는게 이기는 겁니다. 약한 그때에 강함입니다.
본문과 삶
1)그러므로 우리는 약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2)하나님을 의지 하십시오!
3)하나님의 평가 기준을 따라, 하나님의 평가만 염두하며 사십시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그래서 여러분 모두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고,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여러분이 철저히 약한 자가 되는 것뿐입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 분발하여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