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삼상22:1-23절 사무엘상 강해30
제목 : 공동체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성도들의 삶속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레드우드국립공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거대한 삼나무가 있습니다. 이 삼나무의 수령이 보통 1000년 이상 되었으며, 가장 오랜된것은 4000년이나 되고, 가장 키가 큰 나무가 112m를 넘고, 보통 50-100m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국립공원은 골짜기와 해안을 접하고 있어서 거센 바람이 많은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게 자란 나무들이 쓰러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이 되십니까? 뿌리가 깊게 박혀 있을까요? 아닙니다. 도리어 뿌리는 생각보다 깊게 박혀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강한 바람에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학자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각 각의 나무 뿌리들이 깊게 뿌리는 내리는 대신 서로 뒤엉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쓰러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유혹과 시련의 바람이 불어 올 때, 쉽게 넘어질 수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목장)라는 신앙 공동체안에서 함께 할 때, 어떤 유혹과 시련의 바람에도 더 잘 견딜 수 있고, 그 결과 신앙의 거목으로 자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평생 동안 명심해야 할 교훈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두려움과 절망속에 있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선물로 주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공동체의 가치를 깨달고,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며, 그래서 공동체가 주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아픔을 솔직히 고백해야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1절을 보면, 블레셋 가드로 도망을 갔던 다윗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다시 유대땅을 돌아와 아둘람 굴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이 유다 땅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의 가족들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다양한 부류의 사람 400여명이 다윗을 찾아옵니다. 비로서 다윗을 중심으로한 아둘람 공동체가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다윗은 아둘람 굴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었는지, 자신의 증조모인 룻의 고국인 모압으로 갑니다. 그러나 5절을 보면, 다윗은 선지자 갓의 충고를 듣고 다시 유대땅 아둘람 굴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적지 않은 시간동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6-19절을 보면, 그 무렵에 사울이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아히멜렉을 중심으로한 제사장 85명을 학살하게 됩니다. 그리고 20절에 아히멜렉의 아들인 아비아달만이 살아남아 다윗에게 도망치고, 아둘람 굴에 모인 400여명의 공동체안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특별히 아둘람굴과 연관된 다윗의 시인 시142편과 시57편을 중심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영어 단어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바로 스트레스라는 말이랍니다. 그 만큼 우리 나라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가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느 정신과 의사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스트레스가 많은 이유가 ‘참는 것이 미덕이라는 유교사상’에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참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참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신앙의 덕목이기도 합니다. 예를들면, 아픔을 참는 것, 유혹을 참는 것, 분노를 참는 것, 욕망을 참는 것.., 등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아픔이나 슬픔을 하나님 앞에서까지 참는 것을 올바른 신앙의 모습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의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만일 여러분이 다윗의 입장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우선 다윗은 사울로부터 계속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그러나 다윗을 더 힘들게 한 것은 그 위협으로 인한 고통과 고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142편을 보면, 다윗이 자신의 두려움과 답답함을 하나님께 숨김없이, 꾸밈없이 고백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특별히 2절을 보면,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 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 ‘내 우편을 살펴보소서 나를 아는 자도 없고 내 영혼을 돌아보는 자도 없나이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절망과 답답함을 정말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다윗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편에 이런 탄식들이 가득합니다. 예를들면, 시42:2-3절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시22:1절 ‘내 하나님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리고 여러분! 고난을 말 할때면, 항상 떠오르는 인물이 누구입니까? 바로 욥입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그런 믿음의 사람인 욥에게 자녀, 재산, 건강, 아내, 친구들의 정죄..., 그때 욥이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합니까? ‘생일을 저주합니다. 죽기를 구합니다. 정말 억울하다’고 말을 합니다. 초신자가 읽으면 욥에게 시험을 받을 만한 말들을 참 많이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탄식, 욥의 탄식, 그리고 많은 시편기자들의 탄식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소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들 역시 고난과 시련속에서 또한 아픔과 절망속에서 하나님께 솔직히 고백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울라는 것이고, 하나님께 토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너무 힘들다고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게 바로 올바른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보십시오! ‘이 잔을 내게 옮기시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하나님 힘들어서 못살겠습니다.’ 라고 마땅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참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고 얼마든지 도와주실 수 있는 초월적인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말할 수 없는 아픔과 괴롬이 있는데, 부모된 여러분에게 숨긴다면, 대견하다고 칭찬하시겠습니까? 안타까울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아픔과 상처와 슬픔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의 마음에 임하고, 여러분의 마음이 치유될 것입니다. 오늘 이 저녁 여러분의 아픔을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픔을 하나님에게만 고백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서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약5:16절을 보면,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카톨릭의 7성사 중 고해성사가 나온 것입니다. 물론, 신부에게만 죄를 고하고 사죄의 선언을 받는 것은 틀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순히 죄의 문제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이땅에 생겨나게 된, 아픔, 절망, 낙심, 답답함, 힘겨움.., 등 모든 것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나누는 사람이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공동체는 인간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축복의 선물입니다. 다윗도 아둘람 공동체를 갖게 된 이후 고백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교회 공동체 여러분이 자신의 아픔과 답답함을 하나님께 꾸밈없이, 숨김없이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공동체안에서 자신의 아픔을 서로에게 내려놓을수 있는 그리고 품어주고 받아 줄수 있는 그런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힘들고 절망 가운데 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바로, 아둘람이라는 신앙의 공동체였던 것입니다.
2.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23절을 보면,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하는 말이 나옵니다. 즉, ‘두려워 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이전의 다윗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지난주간까지 살펴본 다윗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믿음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본문 이전의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거짓말로 배고픔을 채우려 했던 사람이며, 사울의 공격이 두려워 골리앗의 칼을 갖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사울을 두려워한 나머지 골리앗을 칼을 가지고 골리앗의 고향인 가드로 망명을 갖다 미친척을 할 정도로 판단히 흐려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다윗은 더 이상 이전의 다윗이 아닙니다. 도대체, 다윗에게 있던 두려움, 외로움, 낙심과 절망, 열등감..., 이 어디로 간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나무를 뽑아버리듯, 그런 요소들을 다윗의 삶에서 뽑아버리셨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제 시57편을 보십시오! 이 시편도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을 때 기록한 시입니다. 바로 아둘람 동굴에 거할 때 기록한 시입니다. 보시면,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먼저 7절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노래하리라’ 고 고백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다윗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확정되었고, 이제 찬송을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이렇게 바뀐 이유가 무엇입니까? 2절에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리고 10절에 ‘주의 인자는 커서, 주의 진리를 궁창에’ 라고 고백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큼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마다로 말한다면, 아픔과 상처, 두렴과 고통속에 있던 다윗이 비로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은 신음과 한숨이 아닌, 찬송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랑이 많으신, 그리고 능력이 무한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니 더 이상 자신의 문제가, 더 이상 어려운 문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이 어디서 나온 것입니까? 혼자 있을 때가 아니라, 바로 아둘람 공동체안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들이 공동체안에 머물 때, 하나님은 감동도 주시고, 깨달음도 주시고, 결심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축복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살면서, 참 많고 다양한 어려움을 격게 됩니다. 그럴때, 여러분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즉,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니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가난이 문제가 되지 않고, 실패가 문제되지 않고, 환경이 문제되지 않고, 열등감이 문제되지 않고, 상처가 문제가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염려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내 문제가 너무 커서 하나님이 감당하실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작은 분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게 될 때,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나가서, 본문의 또 다른 신앙의 인물인 아히멜렉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히멜렉이 어떤 사람입니까? 14절에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에게 다윗을 변호, 다윗을 죽여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말을 합니다. 지금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 편에서 선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고 진리 편에 선 사람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때,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아히멜렉과 제사장 85명을 죽이는 일과 같이 진리에서 떠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공동체안에서 서로에게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은혜의 일을 할수 있기 바랍니다.
3.아둘람 신앙공동체의 구성원?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지쳐있는 다윗에게 아둘람이라는 공동체를 선물로 주셨음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주셨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먼저, 다윗의 가족들입니다. 이들은 외롭고 힘든 다윗에게 매우 큰 평안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을 찾아온 400명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그에게 모였고’ 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부모 형제도 아니고, 아는 사람도 아니고, 사울의 정권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고, 분노심으로 가득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들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모두가 마음에 분노가 가득하고 상처가 많은 사람들입니다. 성격도 보통이 아니고, 상처 주는 말을 잘하던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대단이 이기적이고, 공격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하고, 그래서 참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도리어 이런 사람들은 사랑과 위로, 보호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일 여러분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해주라는 뜻임을 알고 품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문제만으로 힘들어하는 다윗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400명을 공동체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윗이 자신의 아픔과 절망을 비로서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게 된것과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것이 바로 이들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도무지 이 400명을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음을 알게 된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호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합지졸같고, 감당하기 어려운 이 사람들이, 십수년후에는 다윗의 나라를 세우는 개국공신들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제들은 잃고 도망온 아비아달 역시 훗날 다윗나라의 대제사장이 되어 다윗과 함께 하게 됩니다. 결국, 아픔과 상처 많은 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결국, 이들을 다윗의 나라의 큰 재목으로 준비하는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배울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공동체, 아니 이미 주신 공동체가 다윗에게 주신 공동체와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고, 아픔, 상처, 날카로운 말, 분노, 증오, 절망, 서러움, 예민함.., 등 이런 사람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보아도 그렇지요? 그러나 그들을 여러분을 위해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으로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윗에게 임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낙심, 절망, 아픔과 분노, 나약함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랑하는교회를 다윗에게, 400명의 연약한 사람들에게 주신 아둘람 공동체임을 알고, 더욱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신앙의 공동체는 가정 다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입니다.
본문과 삶
1)먼저, 하나님과 서로(공동체안)에게 아픔과 마음을 나눕시다.
2)하나님을, 그리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봅시다.
3)신앙의 공동체를 귀하게 여기고, 머물고, 사랑합시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이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주신 아둘람 굴로 삼고, 이 안에서 신앙의 거목으로 자라갈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