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12:1-5절 고린도후서강해64
제목 :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들은 것은 잊어버리고, 본 것은 기억하고, 경험해 본 것은 이해하게 된다.’ 무슨 말입니까?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통계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글로 읽은 것은 10%를 기억하고, 들은 것은 20%를 기억하며, 본 것은 50%를 기억하고, 말한 것은 70%를 기억하고, 행동한 것은 90% 이상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것 역시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 또는 체험은 교육이나 인생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참 중요합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바울이 경험한 신앙적인 체험을 소개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체험을 중요성을 확인하고, 또한 신앙적인 체험보다 더 중요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배움으로 신앙의 더 큰 유익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체험은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바울이 경험한 영적인 체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본 환상과 자신이 들은 계시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보고 들은 것은 무엇입니까? 2절 하반절을 보면, 셋째 하늘을 보았다고 말을 합니다. 4절에서는 그것을 낙원이라고 말을 합니다. 참고로, 낙원과 천국의 개념을 이해하십니까? 종 종 어떤 사람들은 카톨릭적 사고를 가지고 낙원을 천국에 가기 전에 잠시 머무르는 장소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묻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가기전에 머무르는 곳에 계실까요? 천국에 계실까요? 낙원과 천국은 동일하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4절을 보면,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의 소리를 들었다고 말을 합니다. 정말 굉장한 신앙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14년이 지난 지금에도 바울은 생생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3인칭 어법으로 말을 합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우리는 분명히 바울의 체험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이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체험한 이야기를 대단히 신중하게 하기 위함이거나, 또는 자기가 말하고 있는 체험들을 자기 자랑으로 삼지 않으려는 의도 일 것입니다. 이 점은 1절에서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랑이 목적이었다면, 바울은 자신이 본 것과 자신이 들은 것에 대해서 더 자세히, 더 장황하게 설명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어떤 광경을 보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의 신앙의 체험을 말하기만 합니다. 그 이유는 자랑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첫 번째로 생각할 것은, 신앙적인 체험의 필요성에 대해서입니다. 이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의 위대함에 대해서입니다. 물론, 성경은 바울의 위대함을 말하려는 의도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핍박자였던 바울을 변화시키시고, 위대하게 쓰신 하나님을 말하려는 것이 의도입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의 유익을 위해서 바울의 위대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바울은 기독교 역사속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이며, 그리스도인이며, 선교사라고 말해도 지난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먼저, 바울은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는 신약27권 중 13-14권의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장 명확하게 정립한 사람이며, 더나가서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죄는 무엇이며,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성령이 어떤 분이며, 율법의 역할이 무엇이며, 구원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종말이 무엇이며, 부활이 무엇이며, 은사가 무엇이며, 그 밖에도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너무나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또한, 바울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신학적인 면에서만 위대하시지 않습니다. 바울은 철저히 말씀대로 살아가기 위해 힘썼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날마다 달음질 했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은 열정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고, 많은 은혜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항상 겸손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를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까지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본다면, 이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을 만한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맞습니다. 또,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바울은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2,3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지역(유럽)에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로마 감옥에 수감된 바울이 AD67년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듯 바울은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위대함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많이 배웠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라 생각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이 경험한 다양한 신앙적인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오늘 본문은 낙원에서 특별한 말을 들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것, 그 밖에도 많은 신앙적 체험이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바울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했고, 성령의 도우심을 경험했고,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일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위로와 힘주심도 경험했고, 기도의 응답도 경험했고, 아마도 성경에 기록된 사건만으로 본다면, 바울은 성경에 소개되는 신앙의 인물들 중에 가장 많은 신앙의 체험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바울의 위대함과 바울이 경험한 신앙적인 체험들이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점은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들면, 야곱을 보십시오! 브엘세바 곧 벧엘에서, 라반 삼촌집에서 그리고 얍복나루에서의 신앙 체험이 없었다면, 그의 인생, 그의 신앙에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그는 인간적인 야곱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신앙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신앙의 실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윗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기에 골리앗 앞에서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11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당할 때, 모두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11명의 제자들은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고, 정말 신앙의 실력자들이 됩니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바꾸었고, 능력있게 했을까요? 바로 신앙적 체험 때문입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 오순절의 성령강림이라는 신앙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개신교에는 여러 교단이 있습니다. 장로교단, 감리교단, 성결교단, 침례교단, 그리고 오순절교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장로교단의 1/3이 오순절교단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오순절교단이 주목 할만한 성장을 이룬 것은, 잘 가르쳐서가 아니라, 방언, 예언, 은사체험..., 등과 같은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성경적인 교단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들의 주장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속에 체험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는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적 체험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34:8절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겨우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전부이고, 신자답게 살지 못하고,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게 될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신앙적인 체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수영을 배우는데 직접 수영복을 입고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책을 통해 이론만 배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지겨워 못 견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매번 설교를 듣기만하고 배우기만 하고, 그런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신앙생활이 지루하고, 무미건조해지겠습니까? 그러다 보면, 신앙생활이 재미가 없고,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는 말이 있듯이, 신앙의 체험을 한번 두 번 체험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들면, 어려움을 만났을 때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도우시는 체험을 한다면, 예배시간에 하나님이 큰 은혜를 주심을 체험 한다면, 찬양을 부를 때에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의 손길을 경험하게 된다면...., 등 이러한 신앙의 체험을 가지게 되면, 신앙생활에 뭔가 재미가 있고, 열심히 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남에 의해 마지못해 하는게 아니라, 신앙생활을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신앙생활속에서 체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를들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읽을 때에 뜨거워 지는 체험, 기도할 때마다 응답받는 체험, 찬송을 부를 때 평안 얻는 체험, 봉사하는 기쁨을 체험, 누군가를 진심으로 용서하는 체험, 하나님의 간섭과 인도를 받는 체험, 성령의 위로와 도우심을 체험, 성령의 충만을 체험..., 등을 풍성한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면, 여러분의 삶과 신앙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신앙생활에 힘과 끈기가 생기고, 신자다운 삶이 더욱 가능해질 것입니다.
2.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과연 바울이 자신의 신앙적인 체험을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에 대해서입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분명한 것은 바울이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자랑하고 과시하기 위함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역시 참 사도됨을 변증하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즉,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거짓사도들에게 현혹되고, 그들을 참 사도로 여긴 이유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거짓사도들이 신비한 체험들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한 신비한 체험으로도 자신은 결코 거짓사도에게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더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비한 체험, 또는 어떤 신앙적인 체험들도 분명히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중요한 것을 말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계시’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을 하려는 것이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말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것을 말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그러한 것을 보고 듣게 하셨다고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이 알게 하심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독교는 분명히 초월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초월이 아닌 계시에 목적을 둔 종교임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둘째로, 신앙의 체험, 또는 신비한 경험이 여러분의 신앙의 수준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더 실질적으로 말을 한다면, 방언을 한다거나, 뭘 보았다거나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 좋다고 말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를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방언이나 예언이라는 신비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신앙수준을 놓았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어린아이 같은 신앙의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앙적인 체험이 우리의 신앙의 유익을 주는 것은 맞지만, 그것 자체가 나의 신앙의 수준을 반영하는 것은 결코 압니다. 현재 바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어떤 신비한 체험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훌륭한 주의 종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한 체험이 있다고 해서 훌륭한 신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셨습니까? 보통 2가지입니다. 디모데처럼 기독교 신앙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모나지 않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바울과 같이 신앙과 담을 쌓고 살다가 어떤 사건, 심경으로 변화되어 예수 믿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특별히 신앙적인 체험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다면,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 신앙적인 체험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디모데보다 특별나고 남다른 사람이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평범한 방법으로 안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간섭이 아니고는 예수 믿는자의 자리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더 악하고 못났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어떤 신비한 체험은 그 사람의 탁월함이나, 남다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신자들이 더 많은 신앙의 체험, 신비한 체험을 바랍니다. 그래야 고급한 신앙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신앙은 내용이어야지, 신비적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신앙적인 체험보다 하나님을 아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경험하게 하시는 다양한 신앙적인 체험의 목적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알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정말 신비한 체험이고 대단한 체험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체험을 하게 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생명의 주인이시며, 의지할 자임을 알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많은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랑, 과시입니까? 아닙니다.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을 보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이렇듯, 모든 신비한 경험, 신앙적인 체험은 하나님을 더 알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6:6절 이하 ‘나는 인애를 원하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를 더 받아내기 위함이 목적이 될수 없고, 뭔가를 자랑하고 과시하는 것이 이유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감사와 보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힘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신비한 체험을 하는 것입니까? 신앙적인 체험을 더 많이 경험하는 것입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장 힘써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을 더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호4:6절에서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고 말했고, 호6:3절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로와를 알자.’ 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더 알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인격도 성품도 신앙에도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2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열심히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예배 시간마다 졸지 말고,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또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신앙적 체험도 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 알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기독교의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서 시작이 됩니다.
본문과 삶
1)즉,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알리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2)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위해서 때때로 신비한 체험이나, 신앙적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3)그러므로 체험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체험이 있는 신앙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더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날마다 알아감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신앙의 인격과 성품과 수준이 고급해지는 복된 삶을 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