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11:28-33절 고린도후서강해63
제목 : 가장 중요한 증명!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여러분은 솔로몬의 유명한 재판을 아실 겁니다. 어느날 아이 하나를 데리고 두 여자가 솔로몬왕에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각 각 자신이 아이의 친모라고 주장을 합니다. 쉽지 않은 재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유전자 감식 기술이 있다면 아주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그런 기술이 있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솔로몬은 신하들에게 칼을 가지고 오라고 명하고,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씩 나눠주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때 그 아이의 친모가 솔로몬왕에게 아이를 죽이지 말고 상대방 여자에게 주라고 말을 합니다. 그때 등장하는 표현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입니다. 결국, 솔로몬은 그 마음을 보고 누가 친모인지 알게 됩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애타는 마음을 근거로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는 바울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울이 가진 그 마음을 배우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성도들을 향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
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는 내용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지금까지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의 사도됨을 증명하려고 했었는지 기억이 납니까?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진리의 문제 앞에 결코 타협하지 않음,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고 더 더욱 은혜를 필요로함, 하나님 편을 드는 것(꾸중),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열심을 내가 아닌 하나님을 들어냄, 겸손함, 어떤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고 감당함..., 등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기 위해 제시한 것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기 위해서 자신의 특별함을 말하거나, 자신의 자랑거리를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즉, 자신의 공로나 업적을 근거로 자신의 사도됨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사도들과 참 사도인 바울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사도들은 자신의 특별함을 강조했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앞세워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한가지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다운 신앙이란 자신의 특별함이 들어나거나 자신이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증거되고 들어나야 그게 참다운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갖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역시 바울이 자신이 참 사도임을 변증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고 있을까요? 28절을 보면,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23-27절에 말한 자신이 당한 여러 가지 고난들 곧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고,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고,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거짓 형제 중의 위험,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 곧 자신의 마음을 짖 누르는 고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 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합니다. ‘누가 약하면(믿음과 신앙이 약함)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유혹과 시험으로 인해 범죄함) 되면 내가 애타지(마음이 불붙는 것 같음, 안쓰러움-아이가 처음 아펐을 때) 아니하더냐.’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육신이 당하는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을 걱정하고, 그들로 인해서 애타는 마음의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내가 거짓말 아니하는 것을 아시느니라.’ 고 말을 합니다. 즉, 교회를 향한 성도들을 향한 그 마음은 조금도 거짓이 아니고, 자신의 그 마음을 하나님은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0절을 보면,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말을 합니다. 즉, 이러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이 자신이 사도라는 가장 중요한 증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신의 아이의 죽음을 염려하고, 자신의 아이를 향한 애타는 마음을 가진 여인의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진 여인이 친모였듯,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가진 것이 사도됨의 증명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마음이 바울을 부르신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신자로서의 정당한 삶을 살지 못했고, 더나가서 자신을 사도가 아니라고 공격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향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린도교회 안에 자신들은 참다운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에게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20절을 보면,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 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빰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한 염려나, 애타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도리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만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 참 사도로 믿고 따르는 것을 보며, 바울은 더 큰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무엇을 증명하고자 하는 아시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남다름도 아니요 잘남도 아니요, 자랑거리도 아닌, 모든 교회와 모든 성도들을 향한 멈추지 않는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이 가지는 한결같은 마음이라는 점입니다. 소돔성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며 중보한 아브라함의 마음이고,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말했던 모세의 마음이고, 백성이 죄에서 돌아서지 않고,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바라보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참다운 목회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특별한 사람,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 스펙이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맡겨진 영혼들을 향해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목회자가 참다운 목회자인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교회는 건물이 좋고, 재정이 넉넉하고, 프로그램이 다양한 교회가 아닙니다. 서로를 염려하고 애통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훌륭한 교회입니다. 참다운 신자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다운 신자는 뭘 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서로를 염려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진 성도가 참다운 성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잃으면 더 이상 신자다울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바울처럼 서로를 향한 염려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의 아픔과 연약함으로 인해서 애타는 마음이 있습니까?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신앙의 생활을 잘 못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성도를 보며,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왜 아직도 저것 밖에는 안되? 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내가 더 낫지? 라는 마음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아직 참다운 신자의 모습이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하고 부족한 성도들을 보며, 빨리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경험하고 신앙이 자라기를 바라는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참다운 신자인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서로를 향한 염려의 마음, 애타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이 신자라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증명입니다.
2.왜 애타는 마음이 안생기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바울이 하나님의 사도라는 점을 ‘염려와 애타는 마음’으로 증명하고 있음과 목사인 저와 신자된 여러분 모두가 그러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과연 우리들이 서로에 대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이유?’ 에 대해서입니다. 물론, 여러분의 마음에 서로에 대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있지만, 그러한 마음이 약해지거나, 그러한 마음을 놓치는 순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서로에 대한 염려하는 마음과 애타는 마음이 놓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하게 3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성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죄성은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발시키는 원인만이 아니라, 아무리 선하고 거룩한 것도 철저히 자기중심적, 이기적인 방향을 이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다른 사람을 향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놓치게 됩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창18장에 아브라함이 심판이 예고된 소돔성을 위해 중보했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소돔성에 의인50명,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이면... 이런 식으로 6번이나 하나님께 중보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참 당돌해 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하시겠다는데, ‘하나님이신 분이 그래도 되겠습니까?’ 라는 식으로 따져 묻는 것 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소돔성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중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조카 롯의 가정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께 부름 받은 분명한 이유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12:3절에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러한 부름의 이유를 알기에 아브라함은 죄악으로 심판받을 땅인 소돔땅을 위해서 중보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에 대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갖지 못하고, 도리어 이방인들 앞에서 특권의식만 내세우고, 개취급을 했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사장나라 라는 부름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서로에 대해 염려하고 애타는 마음을 품지 못하거나, 쉽게 놓치는 이유는, 우리가 부름을 받은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를 염려하고, 서로를 향해 애타는 마음을 품도록 부르시고 구원하신 것입니다. 셋째는, 한 몸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은 다양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구원은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한 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한 몸입니다. 여러분 한 몸이 무엇입니까?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 한 몸입니다. 롬12: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이게 한 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향해 염려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애타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가장 시급하게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서로를 염려하는 마음, 서로를 바라보며 애타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이 마음이 회복되기 전까지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고(울리는 꾕과리),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도 없을 것이며(아무 유익이 없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신자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을 것입니다. 그리고 도리어 우리는, 이 시대의 바리새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꾸중하셨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꾸중하셨다는 말은 그들을 하나님의 참다운 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참다운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식의 문제일까요? 신앙의 실력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백성들에 대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눅18:11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세리에 대한 염려와 애통이 없습니다. 또, 마23:4절을 보면,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라고 말을 합니다. 또, 6-7절을 보면,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리고 이들은 늘 자신들이 제시한 대로 율법에 순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조금도 백성들을 향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서로에 대한 염려, 서로에 대한 애타는 마음을 놓치면, 서로를 늘 비난하고 정죄하는 이 시대의 바리새인이 될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에 대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3.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그렇다면, 참 사도, 참 목회자, 참 신자의 증표인 ‘서로에 대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을 하면, 우리 스스로 창출해 낼 수 없습니다. 이미 여러차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린바와 같이 우리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서로에 대해 염려하는 마음과 애타는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안에서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오면 됩니다.
첫째,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서로에 대한 염려하는 마음과 애타는 마음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분명히 주실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기도를 하고 계십니까? 하셔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즉, 우리들이 서로를 염려하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애타는 마음을 품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그런 사랑과 은혜를 받은 것을 잊기 때문이고, 여전히 누군가의 염려해줌과 애통해줌을 받아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본문이 있습니다. 바로 마18장의 일만달란트 비유입니다. 보면, 임금에게 일만달란트 빚진자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스스로 어떤 방법으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유일한 방법이 있다면 임금에게 탕감받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빚을 갚을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불쌍히 여겨 놓아주며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임금은 그와 그의 가족을 염려한 것이고 애타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종은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동료에 대한 염려와 애타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마음이 왜 안생겼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임금에게 탕감받은 사랑과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 다르게 말하면, 염려해주심과 애타해주심을 말할수 없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염려해주심과 애타해주심이 필요합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서로에 대해 염려함과 애타하는 마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우리는 하나님께 염려해주심과 애타해주심이라는 사랑과 은혜를 받아 신자된 자들입니다.
본문과 삶
1)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염려해주고, 애타해주는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2)이것이 가장 중요한 신자의 증명입니다.
3)그러기 위해 한 몸임을 알고, 힘써 기도하십시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우리 사랑하는교회와 성도 모두가 서로를 염려하고 애타해주는 마음을 가짐으로 늘 위로와 격려, 소망이 넘쳐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