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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설교] 겸손과 희생!(고린도후서강해60)
 본문말씀 : 고후11:16-20절
 설교자 : 최용민목사
 설교일자 : 2017.11.22
조회 : 7,215   추천 : 0  
본문 : 고후11:16-20절  고린도후서강해60
제목 : 겸손과 희생!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당나귀와 원님이라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늘 짐만 싣고 다니던 당나귀가 원님을 태우고 마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원님을 알아본 마을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 공손히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나귀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줄 알고 우쭐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부터 원님이 자신의 등에 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원님에게 발길질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매를 맞았답니다. 그리고 다시 짐을 싣고 다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답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자신이 원님인냥 우쭐거렸던 당나귀 같은 거짓교사들에 대해, 그리고 당나귀같은 거짓교사들에게 원님대접을 했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참 사도의 증명이 무엇이며, 참 신자의 증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거짓사도의 특징은 권위를 강조함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16-18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어리석은 일이지만 자신을 자랑하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리석은 일임을 알면서도 자신을 자랑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어리석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걸맞는 수준으로 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9절을 보면, 어리석은 자들을 용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고린도교회안에 들어와 자신이 참된 사도이며, 참 교사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거짓 사도들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예를들면, 너희 곧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잡아먹고, 그들의 것을 빼앗고, 스스로 높이고, 빰을 때리는 일을 했다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말 잡아 먹고, 빼앗고, 빰을 쳤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의 뜻은 거짓사도들이 스스로를 대단히 권위있는 자로 내세웠다는 말입니다. 예를들면, 내가 하나님이 보낸 사도인데 내 말을 안들어..., 이렇듯 성도들에게 권위적이고, 잘 난척하고, 목에 힘을 주고, 무례하게 행동하고, 지난친 것들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당나귀가 자신을 원님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거짓 사도들을 참 사도라고 인정하며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의 당당함, 잘난 척과 무례함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근거에서 나오는 자신감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당나귀 같은 거짓사도들을 원님 대하듯 극진히 대한 것입니다. 바로 이 어리석음을 꾸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거짓사도들을 극진히 대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바울에 대해서는 사도됨을 의심하고 공격까지 한 것입니다. 과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거짓사도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거짓교사들은 대단히 권위적이었습니다. 무슨 일에든 당당했고, 자신감이 넘치고, 무례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권위적이지 않았고, 당당하지도 않았고, 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고전2:3절을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 말을 합니다. 즉, 조금도 권위적이지 않았고, 조금도 당당하지 않았고, 조금도 무례하지 않았고, 무엇도 당당하게 요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도리어 권위도 없어 보이고, 혼자 짝사랑하는 사람같이 늘 안절부절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게 무슨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당당히 뭔가도 요구하지도 않는 바울을 보며, 하나님의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권위가 없고, 당당하지 못하고, 자신이 없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하고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고린교회 성도들을 꾸중하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려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 낸 권위가 있느냐 없느냐가 참 사도와 거짓 사도의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는 것입니다 그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더 강하게 말한다면, 권위적인 사람은 참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바꾸어 말하면, 권위적인 사람은 참다운 목회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넓게 말하면, 권위적인 성도는 참다운 성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권위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권위는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권위도 어떤 모임이나 공동체안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권위와 성경이 말하는 권위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권위의 원천이 다릅니다. 즉, 세상이 말하는 권위는 그 사람의 실력과 능력, 성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권위는 그 사람의 실력이나 능력이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봅시다. 고린도교회에 들어온 거짓사도들은 권위가 자신의 실력과 능력에 온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당당하고, 무례하기 까지 한 것입니다. 오늘날 권세 가진 자들을 생각하면 그 모습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됨이 그리고 사도로서 일하는 모든 것이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오로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너무나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늘 조심스럽고, 안절부절 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어리석음이 여러분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에게 훌륭한 목회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권위적인 사람입니까? 목소리가 크고, 자기 주장과 성격이 강한 사람입니까? 누가 봐도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또 묻습니다. 권위적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잘 하십니까? 권위적이지 않는 사람에게 잘하십니까? 오늘날 목회자들이 왜 권위적인 줄 아십니까? 다 여러분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권위적이어야 능력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어리석은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권위적인 성도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대할 때마다 바울처럼 조심스럽고, 안절부절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참다운 목회자, 참다운 성도의 표입니다.

  2.참사도의 특징은 겸손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 바울이 사도됨을 의심받은 이유가 권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하려는 참사도와 거짓사도의 기준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바로 권위적이나 권위적이지 않냐? 결국, ‘겸손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참 사도이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참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여러분은 겸손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느 모임,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낮추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좀 다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말하는 겸손은, 롬7:18절처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의 말씀대로 그 어떤 선한 것이 없을뿐더러, 내게서 선한 것이 나갈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내게서 진리가 나갈 수 없고, 내게서 복이 나갈 수 없고, 내게서 거룩한 것이 나갈 수 없고, 내게서 긍휼과 자비가 나갈 수 없고, 내게서 생명과 영생이 나갈 수 없음을 아는게 겸손입니다. 이것을 잘 가르쳐 주는 본문이 바로 고전3:5-7절 입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 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생명을 창출해 낼수 없는 자들이고, 복을 결정할 수 없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단지 자신들은 생명을 창출하는데 복을 주시는데 쓰이는 도구와 통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겸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들은 자랑할수 없고, 권위적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만은 무엇입니까? 내게서 진리, 복, 거룩, 선한 것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이 생명과 복을 창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교만인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은 자랑하고 싶어하고, 더나가서 권위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본문과 연관해 봅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됨을 의심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자랑을 하지 않았을까요? 왜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을까요? 이유는 대단히 간단하고 명확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자랑할 것이 많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이 사도됨과 사도로서 행한 그 어떤 일들 속에 자랑할 것이 정말로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말이 이해가 안 갈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알고 있는 대로 바울은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했고, 많은 지역에 교회를 세웠고, 신약성경 13권 이상 기록했고, 병든 자들도 수없이 고쳤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렸고, 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모든 사역의 일들이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에 근거한 것이 아님과, 내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임을 너무나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자랑 할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교만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거짓사도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랑하기를 좋아했고 대단히 교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실력과 능력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의 것을 나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종이 자신의 것으로 일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종은 주인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주인의 것으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주인의 것으로 나누어줍니다. 그것을 자랑 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참다운 종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참다운 종과 거짓 종의 구별 기준이 겸손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겸손한 종이 참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겸손한 종을 사랑하고, 더 존중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겸손한 종이 되도록 돕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더나가서 여러분 모두도 겸손한 성도가 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운데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고, 권위를 인정받을 때 겸손을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권위를 인정받는 것은 여러분의 실력이 아닌, 여러분이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귀가 사람들에게 절받는 것이 그의 능력, 실력 때문이 아닌, 단지 원님을 태웠기 때문과 같은 것입니다. 늘 겸손함으로 참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3.진정한 겸손의 극치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는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변호하는 일은 얼마나 치사하고, 자존심 상하고,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이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명예의 문제이거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결과적으로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바울은 지금 치사하고, 자존심 상하고, 괴로운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것은, 겸손이란 결국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라는 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아무리 겸양지덕을 갖추고 있어도, 누군가를 위한 희생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11장을 보면,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겸손은 무엇입니까? 멍에를 매지 않아도 되는 분이 멍에를 매시는 것입니다. 즉,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이 점은 겸손한 사도 였던 바울의 모습에서도 발견됩니다. 고전9:4절 이하를 보면,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사도로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먹고, 입는 것, 사는 것, 쉬는 것, 위로를 받는 것...., 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희생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고전9:19절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또, 고전10:23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이 겸손의 극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원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희생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세워주기 위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우리들은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희생이야 말로, 겸손의 극치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우리안에는 결코 선한 것이 없고, 선한 것을 만들어 낼 실력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본문과 삶
 1)그럼에도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권위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2)그러므로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3)늘 겸손해야 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목적인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겸손하고 희생할 줄 아는 참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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