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10:9-11절 고린도후서강해54
제목 :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어느 아버지에게 2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2아들이 성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아버지와 똑같은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첫째 아들은 ‘내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로 살다 죽었는데, 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어떻게 알콜 중독자가 안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동생은 형과 달리, 술도 마시지 않고, 훌륭한 지성인으로 살았습니다. 또, 형에게 물었던 사람이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알콜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술도 안마실수 있습니까?’ 그러자 동생이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 아버지가 알콜 중독환자로 살았고, 누구보다 알콜중독의 폐해를 보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렇게 살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형과 동생은 동일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동생은 건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히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함으로 더 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조건 때문에 바울을 사도됨을 의심
우리는 계속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는 내용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됨을 의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주간 살펴보았던 내용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사도된 바울에게 특별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사도라면, 자신들과는 남 다른 뭔가 특별한 것(외모, 탁월한 능력, 신비한 역사..., 등)이 있어야 하는데, 바울에게는 그런 특별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심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무지함에서 온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도나 목회자와 같은 하나님의 종을 세울 때에는 특별한 사람중에서 세우지 않으시고, 더나가서 하나님의 종으로 세운 후에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증거하게 하기 위함이고, 또한 성도들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 점을 잘 몰랐던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이 세운 종이라면 모든 면에서 특별라야 한다고만 생각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무지함에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는 특별한 사람이고, 특별라야 한다는 기대가 많은 성도들에게 시험거리가 되고, 신앙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종은 특별해야 한다는 오해와 착각이 없기를, 그래서 하나님의 종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신앙에 걸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했던 이유가 소개가 됩니다. 10절입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나’입니다.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전에 말한 것처럼, 편지를 통해서는 대단히 강하고, 엄하고, 위협적이지만, 얼굴을 마주하면 전혀 할말도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9절에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고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의 편지를 보면, 그 내용이나 문장력이 대단히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약하고 답답함이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글은 잘 쓰지만 말(설교, 웅변력)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 못하는 사람이 사도일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보기에 바울은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말을 좀 못하는게 뭐가 문제인가 생각이 들것입니다. 네 큰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고린도지역은 로마가 통치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문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웅변에 대한 가치가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던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말을 잘 못하는 것이 대단히 치명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바울은 정말 말을 잘 못했던 사람일까요? 사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생각을 수긍하기 어려운 성경의 근거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행14장입니다. 보면, 바울이 그의 동역자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바울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태어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를 고치게 됩니다. 그러자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 바나바에게는 ‘제우스(쓰스)’ 라고 불렀고, 바울에게는 ‘헤르메스(허매)’ 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제우스는 누구입니까? 그리스의 신입니다. 그러면 헤르메스는 누구입니까? 물론, 신이지만 제우스의 보좌관 정도 되는 신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주목할 것은,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보좌관이면서 당시 웅변가(전령의 신)의 신으로 여겨진 신입니다. 그래서 행14:12절을 보면,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고 말하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것을 본다면, 바울이 말을 못하거나, 웅변력이 부족한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한, 행26장을 보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행26:28절을 보면,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라고 말을 합니다. 또, 32절에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 될수 있을 뻔하였다 하니라’ 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말을 못했던 사람은 분명히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말에 힘이 없는 사람, 웅변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 것입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말을 잘한다는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말 잘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을 합니까? 어떤 말이든 막힘없이 줄 줄 말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는 논리적으로 조리있게 말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는 설득력있게 말하는 것으로 여깁니다.(쇼핑호스트) 그러나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생각하는 말 잘한다는 것은, 어떤 주제에 대한 논리나 내용보다는 ‘수사학적 미사여구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얼마나 아름답게 표현 하느냐’를 근거했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은 말을 잘 못하는 사람, 말에 힘이 없는 사람으로 비춰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을 의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도로서의 조건, 특별함, 말 잘함이라는 조건을 바울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즉, 조건만 중요하게 여긴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이러한 생각속에는 인생을 살아가는 일에도 현실적인 조건이 중요하고, 특별히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도 현실적인 조건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단순히 자신의 사도됨을 변증하는 목적을 넘어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권면하는데 사도됨을 변증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2.조건과 현실이 가장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는데 현실적인 조건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특별히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적인 조건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네 조건과 현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곳이 현실이기 때문이고, 우리 모두는 먹어야 살수 있고, 많은 것들이 채워져야 살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만큼은 조건이나 현실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조건과 현실이 좋아야 신앙생활을 잘하고, 조건과 현실이 나쁘면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조건과 현실은 우리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다시말해, 조건과 현실이 나쁘다고 해서 신앙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반대로 조건과 현실이 좋다고 해서 신앙에 도움이 되지도 않습니다.
이 점을 먼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통해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애굽 땅에 나온 후 광야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다양한 원망을 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다, 마실 것이 없다, 고기가 없다..., 등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원망이 아닙니다. 이들의 원망은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배고파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겠습니다. 목말라서 순종하지 못하겠습니다. 고기를 못먹어서 거룩함을 이루지 못하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조건과 현실이 안좋아서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고, 반석에서 물을 주셨고 메추라기 고기를 먹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광야 40년간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고,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그들의 신발이 달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땅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했습니까?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냈습니까? 아닙니다. 전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또,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의 조건과 현실은 최악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반대자들이 있었고, 반대자들에게 미움과 위혐을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병도 가지고 있었고..., 그렇다고 바울이 신앙생활을 못했습니까? 사도로서의 역할 감당하지 못했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또, 삿9-10장은 아비멜렉과 입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아비멜렉은 사사 기드온의 아들이고, 입다는 몸을 파는 기생의 아들입니다. 이러한 조건만 본다면, 아비멜렉은 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하고, 입다는 동네 건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아비멜렉은 형제 70명을 죽이는 악한 살인마 되고, 입다는 신실한 사사가 됩니다. 이와같은 근거는 성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들면, 사울과 다윗, 아담과 예수, 요셉과 그의 형들..., 등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건과 현실이 좋으면 정말 신앙생활을 잘할 것 같습니까? 극단적으로 물어봅시다. 돈이 얼마나 통장에 있으면 신앙생활을 잘할 것 같습니까? 10억, 100억..., 정말 100억을 가지게 되면 신앙생활을 잘할 것 같습니까? 몇 평짜리 집에 살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50평, 100평..., 여러분의 연봉이, 또는 여러분의 사업의 연매출이 얼마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여러분이 바라는 조건과 현실을 갖춘다고 해서 무조건 신앙생활을 잘 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반대로, 조건과 현실이 나쁘다고 해서 무조건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조건과 현실이 신앙의 방해나,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조건과 현실 때문에 신앙생활을 못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안됩니다. 이것은 결국,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사도됨을 의심했던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3.조건보다 더 중요한 것!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과연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조건이나 현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어진 조건과 현실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타내야 할 반응은 무엇일까요? 바로,‘충성’이라는 반응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바울은 사도로서 사명을 감당하는데 조건과 현실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어진 조건과 현실에 원망과 불평과 핑계라는 반응이 아닌, 충성이라는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했던 고백과 권면이 무엇입니까? 고전4:2절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의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충성이라는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또한 잘 확인할 수 있는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마25장의 달란트비유입니다. 여러분은 달란트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어느 사람이 타국에 가기 전에 종들을 불러 각 각의 재능대로 5,2,1달란트를 맡겼습니다. 그리고 5달란트 맡은 자는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5달란트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2달란트 받은 종도 그것으로 장사를 해서 2달란트의 이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그 받은 것을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랜후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결산을 했습니다. 5달란트 맡은 종은 10달란트를 가지고 왔고, 2달란트 맡은 종은 4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1달란트 맡은 종은 묻어 두었던 1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5,2달란트 맡은 자들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 이라고 칭찬을 했지만, 1달란트 맡은 자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 이라고 꾸중을 했습니다. 이제 한가지 묻습니다. 1달란트 맡은 자는 그것을 왜 땅에 묻어 두었을까요? 1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의도를 오해하거나 몰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1달란트를 가지고 뭘 할 수 있겠냐라는 조건과 현실적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본다면, 2달란트 맡은 종은 정말 훌륭한 종입니다. 얼마든지 5달란트 맡은 자를 보면서, 이것 가지고 뭘 할 수 있냐고,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는 조건과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2달란트 맡은 종은 원망과 불평이라는 반응이 아닌 충성이라는 반응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조건이나 현실보다 중요한 것은, 충성으로 반응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1달란트 맡은 종과 같을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런 조건에서 어떻게 하나님 일을 합니까?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순종합니까? 이런 형편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현실과 환경을 만들어 달라고 기도합니다. 네 기도 하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충성이라는 반응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즉, 조건과 현실이 어떠하든지 충성하려고 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소설가 이외수씨를 아실 것입니다. 어느 독자가 이외수씨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고 합니다. ‘글을 쓰다가 안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이외수씨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집니다.’ 또, 독자가 물었답니다. ‘지겹지 않으세요!’ 그러자 이외수씨가 대답합니다. ‘아니요 글이 나를 지겨워하겠지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충성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조건이 어떠하든 핑계보다는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안되는 이유를 찾는 것 보다는 되는 이유를 찾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되는 이유 100개를 찾는 것보다 되는 이유 1개를 찾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는 충성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하나님은 어떤 조건, 어떤 현실에도 제약을 받는 분이 아닙니다.
본문과 삶
1)그러기에 우리의 신앙도 어떤 조건이나 현실에 제약 받을 수 없습니다.
2)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조건이나 현실을 탓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3)조건 보다 중요한 것은 충성됨이라는 반응입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어떤 조건, 어떤 현실에서도 충성됨을 나타냄으로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임을 입증하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