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8:1-6절 고린도후서강해43
제목 :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헌금!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올해는 전 세계 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의 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기념행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엄밀히 말하면, ‘헌금’ 때문입니다. 즉, 당시 로마교황청과 사제들은 사치와 향략이라는 부패한 생활을 했고, 그로 인해서 교황청은 재정적으로 적자에 시달렸습니다. 그러자 교황청은 독일의 부호인 ‘푸거 가문’에게 막대한 돈을 빌리게 됩니다. 그러나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산피에트로 대성당’(성베드로 대성당)을 건축한다는 명목으로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제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헌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돈이 이 상자 속에 짤랑하고 들어가 는 순간, 영혼은 지옥의 불길 속에서 튀어나오게 됩니다’라고 설교를 했고, 심지어 ‘면죄부를 사면 성모 마리아를 범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의 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게 되었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로 면죄부 곧 헌금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헌금’ 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마게도냐 성도들의 헌금에 대해서, 더나가서 헌금의 진정한 의미,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금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 살펴봄으로 신앙의 유익을 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마게도냐 지역 교회 성도의 구제헌금
먼저, 1-2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마게도냐교회 성도들의 연보(헌금)’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게도냐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어떤 특정한 한 교회가 아니라,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을 하면, 마게도냐는 그리스 북쪽 발칸 반도 지역을 말하고, 그 지역에는 있는 교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뵈레아교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 교회를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낸 연보(헌금)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바로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연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행11:27-30절에 간단한 내용이 나옵니다. 즉,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유대인의 핍박으로 인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크게 격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큰 기근이 생겼고, 그로 인해 예루살렘교회와 성도들이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에 구제헌금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얼마 후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까지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린도교회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보다 먼저 구제헌금을 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교회가 마게도냐지역의 교회들 보다도 먼저 구제헌금을 작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도록 아직 구제헌금을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을 보면,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가 구제헌금을 하기로 먼저 작정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이 먼저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구제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이 구제헌금을 한 것이 결코 넉넉하고 여유가 있어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말합니다. 먼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라고 말을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은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았고,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훼방과 공격을 받았습니다.(행 16:20, 17:5,13) 그런 환난과 시련을 격는 상황에서 구제헌금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극심한 가난’ 라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극심한 가난이라는 말의 뜻은 ‘밑바닥의 궁핍’ 이라는 말입니다. 즉, 더 이상 가난해 질수 없을 정도의 가난에 처해 있었다는 말입니다. 좀 실감나게 말한다면, 2렙돈이 생활비의 전부였던 과부의 수준, 또는, 가루 한 움큼과 약간의 기름이 양식의 전부였던 사르밧과부의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마게도냐 지역 교회의 구제헌금은 시련과 극심한 가난속에서 드려진 것입니다. 특별히 2절을 보면,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 고 또, 3절을 보면,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라고 말을 합니다. 마치 두렙돈이 전 재산이었던 과부가 그 모든 것을 드린 것처럼, 한 움쿰의 가루가 마지막 양식임에도 그것을 엘리야에게 드린 것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상대적으로 대단히 부요한 성도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정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게도냐 지역 교회와 성도들은 도무지 구제연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풍부한 연보를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린도교회와 성도들은 상대적으로 평안함과 부요함속에서 얼마든지 구제연보를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구제연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연보, 또는 헌금은 환경이나, 빈부에 의해 결정되는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많다고 헌금을 잘하는 것도 아니라고, 돈이 없다고 헌금을 못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환난과 시련에 시달리면서 더욱이 극심한 가난속에서 있던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이 기쁨으로, 힘에 지나도록 풍성한 구제연보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은혜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1절에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 라고 말을 하고, 또, 4절에서도 ‘이 은혜’ 라고 또, 6절에서도 ‘이 은혜를’ 이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이 많은 환난과 시련 가운데에도 기쁨으로 연보할 수 있었고, 극심한 가난함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께 빚진자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나가서 마게도냐 지역 교회와 성도들은 예루살렘 교회를 향해서도 빚진자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게도냐 지역 교회는 이방교회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던 이방 땅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 예루살렘교회 때문이라고 확신한 것입니다. 맞습니다. 행15장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공식적으로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후로 이방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고, 그로 인해서 마게도냐에 교회들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마게도냐 지역 교회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교회에 빚진자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환난과 시련과 극심한 가난속에서도 기쁨으로 풍성한 구제연보를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게도냐 지역 교회와 성도들의 구제연보는 은혜를 아는 마음, 빚진자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아주 중요한 한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제 연보만이 아니라,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연보 곧 헌금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헌금만이 아니라, 감사, 수고, 헌신, 섬김, 순종..., 등 모든 영역의 시작도 받은바 은혜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연보는 어떻습니까? 은혜에서 시작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연보는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입니다.
2.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헌금?
우리는 지금까지 모든 헌금의 시작은 은혜를 아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헌금을 드리는 목적’ 에 대해서입니다.
여러분에게 먼저, 묻습니다. 여러분은 다양한 제목의 헌금을 드릴 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11개의 제목으로 된 헌금봉투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11개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11개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는 아마 4-5정도의 제목으로 드리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몇가지의 헌금을 하던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제가 이렇게 묻는 것은, 상당히 많은 신자들이 은연중에 다른 의도와 다른 목적을 가지고 헌금을 드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단순히 의무와 명령 때문에 헌금을 드리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헌금은 단순히 의무와 명령의 차원에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는, 벌 받을까봐 헌금을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또는, 경쟁심 때문에 헌금을 드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예전에 부흥회를 보면, 누가 통장을 내 놓아다, 뭘 내 놓았다...등) 또는, 명분 때문에 헌금을 드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예를들면, 장로, 집사, 권사..., 등 심지어 물질의 기여도에 따라서 좋은 일군이라는 평가도 합니다. 틀렸습니다. 그리고 가장 많은 경우는, 복받기 위해 헌금을 드리는 경우일 것입니다. 마치 헌금을 좋게 말하면, 거룩한 투자, 좀 비약해서 말하면, 영적 야바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바위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야바위한 돈을 놓고 돈을 벌고자 하는 놀음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작은 종지 3개를 엎어 놓고, 그 중 하나에 주사위를 넣고, 섞은후 주사위가 들었을 것으로 예상되는 종지 앞에 돈을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맞추면 몇배의 돈을 받는 놀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헌금을 투자나 돈을 따기 위한 야바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성도들이 이렇게 잘못된 생각을 하게된 것에는 목회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금은 결코 더 많은 물질의 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서는 안됩니다. 이런 헌금은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는 헌금이 아닙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헌금을 많이 한다고 복을 많이 받는 것은 아니고,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하나님께 신앙의 가산점을 더 받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헌금의 액수가 중요했다면,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아닌, 부자들의 헌금을 칭찬하셨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여러분은 반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3장에서 십일조를 말하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복주신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여러분이 바치는 돈이 목적인 분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바친 돈보다 더 많은 것을 주겠다고 하시겠습니까? 십일조는 감사이며,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 고백을 원하신다는 것이지, 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 더 많은 복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복을 제시함으로 감사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함이 목적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목적은, 의무와 명령때문도 아니고, 경쟁심 때문도 아니고, 명분 때문도 아니고, 더 많은 복을 받기 위함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헌금을 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고린도교회의 관점에서, 그리고 마게도냐지역 교회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고린도교회 관점에서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고,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고백’인것입니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후7장의 내용입니다.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꾸짖었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꾸중을 받아 들여 회개하고, 신앙의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에게 구제연보에 대한 권면이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헌금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 내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또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고자 준비 된 자들만 할 수 있는 신앙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개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헌금이란? 하나님이 기뻐하는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겠다는 서약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 서약이 담긴 헌금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다시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고 말합니다. 즉, 지금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많은 환나과 시련, 특별히 극심한 가난에 처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롬5:3절에 대한 믿음 때문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무슨 뜻입니까? 왜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한다고 말합니까? 소망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소망입니까? 단지 앞으로 잘 될 것이라는 소망인가요?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인내만 있어야 하고, 연단이라는 말이 포함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환난을 통해서 자신을 더욱 거룩하게 만드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단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인내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이 환나과 시련, 극심한 가난 중에서도 연보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심에 대한 감사의 고백으로 드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구제연보를 권면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에 하신 것처럼,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도 지금 거룩한 것들을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정한 헌금은, 하나님이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분이라는 감사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헌금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헌금을 드리는 목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서약을 위함이고, 내 자신의 거룩에 대한 소망이 목적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난 헌금은 참다운 헌금,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만한 헌금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3.여러분의 헌금은?
그렇다면, 여러분이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이 기뻐받으실 만한 헌금입니까? 참다운 헌금을 드리고 계십니까? 금액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서약이 담겨진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까? 더나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늘 노력이 담긴 헌금을 하고 계십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더 거룩해주실 것에 대한 소망이 담긴 헌금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을 더 편안하게 해주시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나를 불속에도 넣고, 나를 물속에도 넣고, 더 많이 훈련시키고, 배우게 하시기를 바라는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들 들 볶아 주셔서라도 더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바라는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고 드리는 헌금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진정한 헌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헌금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우리의 신앙의 이유와 목적은 감사와 보답입니다. 그리고 그 보답중 하나가 헌금입니다.
본문과 삶
1)그러나 헌금은 물질이 전부가 아닙니다.
2)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삶,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서약입니다.
3)그리고 나를 더 거룩하게 만들어가심에 대한 감사이며 요구입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이 앞으로 드리는 모든 헌금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실 만한 진정한 헌금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헌금위에 하늘의 복임 넘쳐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