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7:5-9절 고린도후서강해40
제목 : 꾸중히고 꾸중 받기!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기독교와 관련해서 가장 많이 알려진 로마의 황제가 있다면, 아마도 ‘콘스탄틴(A.D305-337)황제’일 것입니다. 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 기독교 신앙에 자유를 부여하고 자유. 평등. 사랑이라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많은 법을 만들어 로마를 기독교화하는 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황제입니다. 그러나 콘스탄틴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만큼 유명한 황제가 있는데 바로, ‘데오도시우스 황제(A.D397-395)’ 입니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 신앙에 자유를 부여했다면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로마가 다스리던 데살로니가 지역에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지역을 통솔하던 로마사령관과 부하들이 데살로니가 시민들을 학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반란으로 인해서 로마사령관과 여러 부하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전령을 보내어, 데살로니가 주민 3000명을 원형경기장에 모아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시민 3000명이 끔찍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밀라노교회의 감독이며 어거스틴의 동료인 ‘암브로시우스’가 듣고 데오도시우스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에게 충고합니다. 요청합니다. 권면합니다. 경고합니다. 지금까지 황제들 중 경건한 황제의 모범이 되었던 당신, 하나님의 은혜로 그토록 존엄한 황제의 권좌를 부여받은 당신이 수많은 무고한 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학살한 죄에 대해 밀라노 교회에서 공개적으로 참회하지 않으면 당신을 출교시키겠습니다.’ 당시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에게 이같은 꾸중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일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꾸중을 들은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밀라노 교회 예배에 참석하여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고하고 용서를 구했다고 합니다. 암브로시우스 감독, 그리고 데오도시우스 황제 모두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도 암브로시우스 감독처럼 누군가를 꾸중할 줄도 알고, 데오도시우스 황제처럼 꾸중을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꾸중한 바울과 그 꾸중을 잘 받아드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꾸중 할 줄 도, 꾸중 받을 줄도 아는 지혜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꾸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주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의 완성’ 이라는 점을 살펴보았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이유는 ‘다른 이의 거룩의 완성을 돕는 자’ 가 되게 하기 위함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간에, 다른 이들을 거룩의 자리를 이끌고, 다른이의 신앙의 완성이라는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2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서로 좋은 관계(믿음과 신뢰, 사랑)를 맺지 못하면 누구도 거룩과 신앙의 완성의 자리로 이끌수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서로를 좋게 봐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문제투성이인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자랑할 것이 많고, 기쁨과 위로가 된다고 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서로의 거룩과 신앙을 돕는자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좋게 봐주어야 합니다. 즉, 죄를 밝히고 들추어 내는 검사가 아닌 죄를 품어주는 변호사의 모습으로 봐주어야 합니다. 또는 점수를 깍는 사람이 아니라 점수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지혜롭게 칭찬해 줄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서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면, 결코 서로의 거룩과 신앙을 돕는자가 될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를 좋게 봐줄 때, 서로의 거룩과 신앙을 돕는자가 될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서로를 좋게 봐주어야 할 근거는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좋게 봐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의인이라고 봐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서로의 거룩을 돕고, 서로의 신앙의 완성을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로를 좋게 봐주어야 하고, 끊임없이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서로의 거룩을 돕고, 서로의 신앙의 완성을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칭찬만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꾸중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거룩과 신앙의 완성을 위해서 꾸중했었다고 말을 합니다. 보시면,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고 말을 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보낸 편지는 무엇입니까?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는 어떤 목적으로 기록된 책입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중요한 이유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잘못을 꾸중하기 위해 보낸 책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와 교회는 아직도 연약하고 부족하고 흠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는 우리 개인과 신앙공동체인 교회안에는 반드시 꾸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헌법 가운데 권징이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즉, 성도 가운데 하나님 말씀에서 벗어난 일을 하거나, 교회의 법을 지키기 않을 때, 교회가 수찬금지, 직분정지, 그리고 출교까지 내리게 하는 교리가 있습니다. 물론, 이 권징이라는 교리가 시행되는 교회는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병드는 이유이며 성도들의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권징을 시행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교회가 천주교처럼 하나로 관리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분명히 교회는 권징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마18:15절 이하를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다음은 2-3증인을 세워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가 말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모든 교회 역시 권징을 시행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뮬론, 권징이 쉽지 않은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저는 설교시간이 권징의 시간, 꾸중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서 위로가 주어지고, 소망도 주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설교는 권징이어야 하고, 꾸중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설교시간마다 하나님 앞에 꾸중을 아멘으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꾸중해야 하는 이유 또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마18장에서 분명히 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15절 ‘네 형제를 얻을 것이요’ 즉, 권징과 꾸중을 통해서 범죄한 사람이 죄를 깨달고, 회개하고, 올바르게 신앙이 세워지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고후6-7장의 교훈을 근거로 말한다면, 서로의 거룩의 완성과 신앙을 돕기 위함이고, 교회의 순결함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오직 이 목적만이 꾸중의 이유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행하는 꾸중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 자랑, 자기 과시 일때가 참 많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경우는 상대방을 위함이나 하나님의 기쁨보다는 자기 마음에 안들어서 꾸중하는 경우, 분 풀이를 위한 꾸중이 될 때가 사실은 많이 있습니다. 릭웨렌 목사의 공동체를 세우는 삶이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을 합니다. ‘우리들이 하는 권면의 대부분은 인격 모독일 때가 많다’ 동감하는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누군가를 꾸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꾸중이 자기 자랑, 자기 과시, 더나가서 마음에 안들어서, 분 풀이로 하는 꾸중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더나가서 여러분의 꾸중이 도리어 꾸중받는 이에게 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꾸중으로 인해서 상대방이 회개하고 돌아와야 하는데, 도리어 꾸중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지 않도록 주의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꾸중으로 많은 성도들이 신앙의 큰 유익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같은 꾸중, 서로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는 꾸중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날카로운 지적일까요? 주도면밀하여 빈틈없는 공격일까요? 아닙니다. 5절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즉,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또, 8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니’ 라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꾸중한 이후로 마음이 너무 조마 조마하고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상처받고 주저앉지 않았나? 신앙을 놔버리지는 않았는가? 괜히 꾸중했나? 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조마 조마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군가를 꾸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군가를 꾸중함을 통해서 유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꾸중에 앞서, 조마 조마한 마음, 두려운 이 마음을 먼저 품으십시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이 없다면, 꾸중을 미루십시오! 저는 우리 사랑하는교회 바울과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꾸중함으로 서로의 거룩의 완성과 신앙의 도움을 주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2.꾸중을 받을 때
지금까지 우리들은 올바르게 꾸중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살펴볼 것은, 반대로 우리가 꾸중을 잘 받을 줄도 알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마음이 조마 조마하고 두려웠던 바울이 디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위로를 얻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8절을 보면, ‘후회하였으니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한다’ 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9절에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고 말합니다. 아시겠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전부는 아니겠지만, 상당수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꾸중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이런면을 본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참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꾸중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에도 꾸중을 잘 받아들인 훌륭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윗왕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밧세바를 간음했고, 그 가운데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이자 충신인 우리야를 전장에서 죽게 했습니다. 그때, 나단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다윗의 잘못을 꾸중했습니다. 그때 삼하12:13절을 보면, 다윗은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라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꾸중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 또, 삼하16장을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도망을 치던 중 시므이라는 사람이 다윗에게 ‘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고 저주 꾸중을 합니다. 그때, 다윗을 보좌하던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가 저주하는 것이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고 말했습니다. 저주와 같은 꾸중까지 받아들인 것입니다. 또, 히스기야왕입니다. 히스기야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민족에서 위문사절단이 찾아옵니다. 그 중에는 바벨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절단에게 자신을 과시하고 자랑하기 위해 나라안에 있는 값진 것들을 다 보여주게 됩니다. 교만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선지자가 찾아와 히스기야왕의 잘못을 꾸중하고 유다의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게 됩니다. 그때, 히스기야왕은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나이다’ 라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꾸중을 받아들입니다. 또, 지금은 소천하신 한경직 목사님의 일화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주일에 한목사님이 장로들과 당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교회의 한 청년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한목사님의 신사참배를 비롯한 죄의 목록을 일일이 열거하더랍니다. 얼마나 무례한 일입니까? 이 때 한경직 목사님이 뭐라고 하셨는 줄 아십니까? ‘다 맞습니다. 사실 난 그보다 더한 죄도 너무나 많이 지은 죄인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계속 우시더랍니다. 비록 신사참배라는 실수를 하셨지만 그래도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꾸중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잘못을 인정하고, 꾸중을 겸손히 받아들 수 있는 사람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누군가의 꾸중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어떻습니까? 누군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꾸중하면 기분 나빠합니다.(사울왕과 바리새인) 그리고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더 심한 경우는 나의 잘못을 꾸중하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공격합니다. 이것이 보통 꾸중을 받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꾸중을 기분 나뻐 하지 않고, 겸손히 받아 들이는 분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훌륭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잘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지난 한 달을 살면서 누군가가 여러분을 꾸중한 일은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여러분은 꾸중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도 여러분을 꾸중한 적이 없다면, 여러분이 완벽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았거나, 아니면 여러분이 꾸중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여러분을 위해서 꾸중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확인이 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꾸중하는 자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의 꾸중을 하나님의 꾸중으로 알고 받을 줄 아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얻게 될 것입니다.
3.억울한 꾸중을 받을 때
미국에서 실제 있었던 일을 하나 소개합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간 한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하고 15년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안정이 되면서 행복하게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야유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한 집사님이 숯에 불을 붙이려는데 라이터가 없었습니다. 주변 성도들에게 물어도 다 없다고 했습니다. 아마 있어도 오해받을 것 같아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목사님의 17살 먹은 아들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커내더랍니다. 홍보용으로 길거리에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 야유회가 마친 후, 목사님 아들에게 라이커를 건네받은 남자 집사님이 아내에게 ‘목사님 아들을 위해 기도해야겠다’ 고 말했습니다. 아내가 그 이유를 묻자 ‘담배를 피는 것 같아~’ 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여집사님이 친한 교회 집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우리 목사님 아들이 담배를 못끊고 있는데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소문이 퍼지고 퍼져, 결국에는 목사님 아들이 마리화나(대마초)를 피운다고 까지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당회에서 목사님 아들을 불러 놓고 심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 아들은 자신은 그런 일이 없고, 라이터를 갖게된 경유를 설명했지만, 믿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억울한 꾸중에 화가난 목사님 아들이 차를 몰고 운전을 하다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알게 된 목사님은 너무나 큰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억울한 꾸중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또는, 잘못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꾸중을 듣고 억울해 할 때도 있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런 꾸중까지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억울하다는 생각에 메이면 안됩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그와 같은 부정적인 억울함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억울함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은 가장 크게 억울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구원받을 만한 이유와 조건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을 만하다고 하시니 얼마나 억울한 일입니까? 또, 하나님께 끊임없이 은혜와 사랑을 받는 것도 너무나 억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에 비해 너무나 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라고 대접 받는 것도 꽤 억울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대접받을 만큼 훌륭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목사가 된 것은 성도보다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셨기 때문에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긍정적으로 억울한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일들에 대해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을 안합니다. 억울하다고 따져 묻지도 않습니다. 억울해서 울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지난친 꾸중을 들으면 몹시 억울해 합니다. 이게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백데나리온 빚지자를 감옥에 쳐넣는 일과 다를바 없는 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긍정적인 억울함과 부정적인 억울함을 계신해보면 어느쪽이 더 억울할까요? 당연히 긍정적인 억울함이 더 억울할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며 살라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꾸중을 들어도, 억울하게 생각하지 말고 받으십시오!(다윗처럼, 주님처럼) 그게 여러분을 더욱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우리 모두는 아직도 불완전하고, 흠이 많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본문과 삶
1)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꾸중이 필요합니다.
2)그러므로 조마 조마한 마음으로 서로를 꾸중하고, 감사함으로 꾸중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3)때로는 억울하다 여기는 꾸중도 받을줄 알아야 합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꾸중이라는 것을 통해, 모두 함께 거룩의 완성을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