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6:11-13절 고린도후서강해37
제목 : 목자와 양의 관계!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우리들이 인생을 살다보면, 참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게 됩니다. 가장 먼저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 형제라는 관계, 그리고 선생님과 제자라는 관계, 선배와 후배의 관계, 친구관계, 동료관계, 이웃관계..., 등 그리고 중요한 것은,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야 유익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예를들면,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야 가정이 바르게 설수 있고, 교사와 학생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야 참다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특별히 목사와 성도 사이, 더 넓게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야 각 자의 신앙과 교회가 바르게 설수 있습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바울이 자신과 고린도교회 성도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자 했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며, 더 넓게는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확인함으로 바른 관계를 정립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사도권을 변호하는 이유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 상의 오해들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첫째는, 은혜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들이 가지고 누리는 모든 것이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실력과 능력의 결과물이라고 오해한 것입니다. 그 결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감사로 나가지 않고, 항상 자랑으로 나갔습니다. 둘째는, 자유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자유를 죄와 사망에서의 자유, 또는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자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닌, 육체로부터의 자유로 오해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방탄과 방종의 삶을 살았습니다. 셋째는, 결과에 대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앙이 좋으면 무엇이든 잘되고, 신앙이 나쁘면 무엇이든지 안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신앙을 세상이 평가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신앙의 평가는 하나님만이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신앙상의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자랑하지 않는 바울, 절제하며 살아가는 바울, 무엇보다 고난과 시련이 끊이지 않는 바울을 보며, 그는 하나님이 세운 사도일리가 없다고, 바울의 사도권을 의심하고 공격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신앙의 오해를 풀고자 고린도전후서를 기록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진 신앙의 오해를 풀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조금 더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사도권을 변호하려 한 것 일까요? 조금 다르게 말하면, 바울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고린도교회의 목사, 목자로 세우셨다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존심 때문일까요? 화가나서일까요? 아니면 서운해서, 아니면 너무나 억울하기 때문일까요? 도대체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되찾고, 고린도교회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목사, 목자임을 변호하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그 이유가 자신을 위함이 아닌,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위함인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을 참 많이 사랑했습니다. 늘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애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책망하고, 권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바울을 목자로 세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바울이 아무리 애정을 가지고 권면을 해도 받아 들일 수 없는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권면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바울을 하나님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목자로 세웠음과 그들이 바울에게 맡겨진 양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의 책망과 권면을 받아들이고, 신앙의 회복과 성숙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되찾으려고 한 것이며, 자신이 하나님이 세우신 고린도교회의 목자임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이 시대 한국교회가 침체하는 이유를 2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권위주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라는 직분을 계급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계급을 통해서 성도들을 지배하려는 자세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목회자의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교회 성도들이 목회자들을 하나님이 세운 사람으로, 목자로 인정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목회자를 교회가 채용한 직원 정도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권위주의는 나쁘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교회안에 권위주의가 있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목회자 그리고 넓은 의미의 목자로서의 권위는 반드시 존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의 권위가 무너지면 교회가 올바르게 세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면 가정이 올바르게 세워질 수 없고, 교사의 권위가 무너지면 올바른 교육이 될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들의 권위를 인정해야 할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들면, 롬13:1-2절을 보면,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말은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나라의 대통령, 정치인, 교사, 부모, 어른..., 등을 포함한 말입니다. 핵심은 무엇입니까? 권세자의 권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히13:17절을 보면,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의 권위를 인정하는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함으로 얻는 유익은 무엇일까요? 크게 2가지 유익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더 잘 복종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권세자들, 그리고 목회자들의 권위를 인정하라고 말씀하신 의도가 있습니다. 예를들면, 나라, 가정,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끌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의도는, 하나님께 대한 복종을 훈련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특별히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는 신자가 될수 있다는 유익을 얻을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목회자들의 권위를 인정할 때, 여러분의 신앙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들어 봅시다. 여러분이 목회자의 권위(하나님이 세운자)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가 되겠습니까? 신앙의 권면을 받아 들이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여러분의 신앙의 유익이 없게 되는 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속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앙의 유익을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실력이 부족해서 일까요? 예수님 잘 못 가르쳐서 일까요? 아닙니다. 말도 안되는 말입니다. 그럼 그들은 왜 신앙의 유익을 얻지 못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메시야로서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한낮 나사렛 출신이며, 목수의 아들로 밖에는 안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그들이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과 권면으로도 어떤 신앙의 유익을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 목자들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2.목자와 양의 책임에 대해서
이제 생각할 것은, 목자와 양 각 각의 책임에 대해서입니다. 먼저, 간단하게 목자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합니다. 여러분은 목사인 제 책임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이 질문속에는 우리 교역자들, 초원지기, 목자들, 직분자들, 교사들의 책임까지 포함된 질문입니다.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3절에서 그 책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입니다. 결국, 목자의 가장 큰 책임은 양육인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더욱 건강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 그리스도의 건강한 제자로 세우는 일이 가장 큰 책임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임을 위해서 진리와 생명을 전해야 하며, 끊임없이 권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임을 위해서 2가지 놓치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목자로서의 정도를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양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며, 또 다른 한가지는, 그 어떤 보상을 바래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다. 목자들이 목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정도를 걷지 않기 때문이며, 보상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제 확인해 봅시다. 목사인 저, 그리고 교역자, 초원지기, 목자, 권사..., 등 교회에서 목자의 사명을 받은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진리와 생명을 붙들고 성도들을 양육하고 세우는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 일을 위해 사랑을 가지고, 모범을 보이고, 당연히 할 일로 여기고 있습니까? 목자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양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양에게 주어진 책임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첫째는, 목자에게 순종하고 협조하는 책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이 원칙이 변하기 전까지 양은 목자에게 순종하고, 목자가 하는 일에 협조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6:16절에 ‘이같은 사람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순종하라’ 고 권면한 것입니다. 흔히들, 성도들 사이에 목사에게 잘하라는 말을 합니다. 그 근거는 갈6:6절 일 것입니다. 즉,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한가지 묻습니다. 목사에게 잘한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목사에게 좋은 선물을 사주는 것일까요? 아니면 목사에게 좋은 식사를 대접하는 것일까요? 전혀 압니다. 목사에게 잘한다는 말은, 목사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더욱더 변화되어 가는 것이 목사에게 잘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가르침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일이 없다면, 여러분은 목사에게 잘하는게 아니고, 하나님에게도 잘하는게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목사에게, 목자에게 잘하기 바랍니다.
둘째는, 격려하는 일입니다. 고전16:10절을 보면,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디모데는 이 당시 젊고, 경험이 많지 않은 목회자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디모데에게 고린도교회에서의 목회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두려움이 없게 목회하도록 격려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은 목자를 격려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0명 정도되는 시골교회 목사님의 일화 – 40일금식 선포, 20일정도쯤 포기, 별의 별생각, 그리고 금식중단 결정 후 힘들게 안수집사에게 금식 중단과 하산소식을 전달, 하산, 평지에 몇몇 사람이 서있음, 성도 모두가 나와 ‘목사님 수고 했어요, 자랑스러워요’ 라는 핏켓, 안수집사 손에는 따듯한 죽, 금식에 실패한 목사님은 그런 성도의 사랑에 다시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을 성공하고, 훌륭하게 목회를 했다고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꼭 일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사, 목자도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목사가 되고, 목자가 된 것이 우리의 실력이나 능력이 근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여러분 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목사로 세우고, 목자로 세운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양은 목자를 위로하고 격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묻습니다. 여러분은 목사, 목자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위로와 격려라는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목자의 책임은 진리와 생명으로 양육하는 것, 곧 그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며, 양의 책임은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에게 순종하며, 그 일을 잘할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양답냐? 목자답냐? 와 상관없이 목자의 책임, 양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책임이 그 대접을 받을만한가와 상관없듯이)
3.목자와 양의 관계
이제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의 핵심이 무엇인가? 에 대해서입니다. 그것은 ‘목자와 양은 서로를 세워주는 관계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얼마전 cbs에서 들은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설교를 잘 하시기로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한때는 설교에 너무 자신이 없고, 심지어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이 너무나 괴로운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성도들이 예배를 마치면 ‘오늘 말씀에 너무나 은혜 받았다’ 는 인사를 하더랍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말에 목사님은 용기와 도전을 얻었고, 그래서 목사님은 설교를 잘하기 위해 더 많은 준비와 기도를 했답니다. 그리고 지금은 유명한 설교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성도들이 목사님이 설교로 인해서 늘 낙심하는 것을 알고, 힘내라고 은혜 받았다는 인사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도들이 목사님을 사랑으로 섬겨주었고, 그 결과 목사님은 훌륭한 설교자가 되었고, 훌륭한 설교가가 된 목사님으로 인해서 성도들은 말씀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간증을 들으면서 정말 훌륭한 성도이고, 훌륭한 목사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들이 주목할 점은, 훌륭한 설교가가 되도록 성도들이 세워준 것이고, 훌륭한 성도가 되도록 목사님이 세워주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에게만 성도들의 신앙을 세워주는 책임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에게는 성도들의 신앙의 세워야 하는 책임이 큰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도 훌륭한 목사가 되도록 세워주는 책임이 적지 않다는 것과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는 점을 놓치면 안됩니다. 또 그것이 여러분에게도 유익하고 교회에도 유익하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바랍니다. 제가 훌륭한 목사가 되도록 힘써주십시오! 그것이 저를, 그리고 여러분 자신을 훌륭한 성도로 세워져 가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목자와 양의 관계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올바르게 정립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 다양한 관계속에 두셨습니다.
본문과 삶
1)특별히 우리를 목자와 양의 관계속에 두셨습니다. 때로는 내가 목자가 되기도, 양이 되기도 합니다.
2)목자는 생명과 진리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책임, 양은 순종과 격려라는 책임을 가집니다.
3)중요한 것은, 목자와 양은 서로를 세워주는 관계입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다양한 관계, 특별히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 함께 자라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