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5:16-19절 고린도후서강해29
제목 : 완전한 신자는 없습니다!
성도들의 삶속으로 (지난 3일간의 사건과 삶)
저는 자연다큐멘타리를 참 좋아 합니다. 특히 동물이 나오는 다큐를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동물들을 보면서 늘 신기했던 것은, 말이나, 사슴의 새끼가 태어나면 금방 일어서고, 걷고, 뛰고, 스스로 어미의 젖을 찾아가 빠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기가 걸으려면 적어도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나면 끊임없이 엄마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즉,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보살피고...,등 그리고 아이가 자라면서 많은 선생님의 손길도 필요합니다. 그 밖에도 아이가 살면서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과연 이유는 무엇일까요?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완전하게 태어난다면, 전혀 다른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기에 많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우리 자신뿐 아니라, 모든 신자가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누구라도 보살핌과 이해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를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누구도 완전한 신자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우리 모든 신자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무엇입니까? 고쳐지거나, 수리되어진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옛사람과 전혀 연속성이 없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음 받은 새 사람이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새사람 답지 못하고, 여전히 옛 사람의 모습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새사람으로서의 경험과 습관이 적은 반면, 옛 사람으로서의 경험과 습관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가 새 사람으로 태어날 때, 영적인 신생아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즉,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나타낼만한 수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신생아가 사람답게 행동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실 것이고, 또한, 더불어 우리 자신의 신앙을 완성해 가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음을 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고 거룩한 습관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신앙을 더욱 완성시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씀의 교훈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는 말씀을 묵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우리 자신의 관점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묵상을 하려고 합니다. 먼저, 16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고 말을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쉽게 말하면, 그 누구도 흠잡지 말고, 부족한 것을 정죄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식대로 표현한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이 왜 그래? 신자가 왜 그래? 라고 말하거나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서로를 육체대로 알지 말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진 잘못된 생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완전주의입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말을 완전한 사람이 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잘못된 생각이 가장 분명히 들어나는 대목은 바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성을 의심받고 공격받는 장면에서 확인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했고, 사도가 아니라고 공격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완전주의 때문입니다.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라면 완전해야 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 보기에 바울은 참 대단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당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는 사도로서 의심을 받을 만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당시 교사들처럼 어떤 증명서를 가지고 있거나, 유명한 사람으로부터 추천서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글에는 능했지만 말에는 힘이 없었습니다. 요즘식대로 말하면, 책은 잘 쓰는데, 설교를 유창하게 잘하지 못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외모도 볼품이 없었고, 심지어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로 묘살될 정도로 심각한 질병까지 있었습니다. 더욱이 바울이 사역하는 과정에 많은 실패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반대와 공격을 당했습니다. 이런 바울을 보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성을 의심하고 공격하게 된 것입니다. 핵심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사도라면 완전해야 하는 것 아니라냐고 공격을 한 것이고,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고, 심지어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할지라도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말하기 위해서 신자가 되었다는 말을 새로운 피조물 곧 새롭게 태어난 존재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우리들 역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같은 완전주의적 모습이 있습니다. 즉,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궁극적인 목표는 맞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결코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을 향해서 완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닌 것 같습니까?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 종 다른 신자들을 보면서 자신이 생각한 수준에 미치지 못하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해~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 직분자가 어떻게 저 모양이야~...., 등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까? 분명히 있습니다. 그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완전주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새로운 피조물이된 그 누구라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의 인물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노아, 야곱, 모세, 엘리야, 베드로..., 등 완전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치 롬3: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처럼 완전한 신자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아담과 하와처럼 장성한 성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수 없고,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갓난아기로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는 거짓말 쟁이가 있을수 있고, 예수 믿는 악당이 있을수 있고, 예수 믿는 음난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예수 믿는 못된 사람이 있을수 있고, 예수 믿는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도 있을수 있고, 예수 믿는 말 실수 많은 사람도 있고, 예수 믿는 몰지각한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믈론, 지금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예수 믿으면서도 거짓말하고, 악하고, 음란하고, 이기적이고, 못된 것이 당연하거나 정당하다고 말하려는게 아닙니다. 지금 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1차적으로는 예수 믿는 것과 도덕성은 별개이고, 예수 믿는 것과 성격이나 인간성도 별개라는 것입니다. 마치 갓난 아기에게 성품이나, 도덕성이나, 인간성을 연관시키지 않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도덕성, 인간성, 인격, 성품..., 등은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2차적인 문제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자로서의 완전함을 요구하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하는 당연한 것을 가지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러면 안됩니다. 이런 잘못에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2.그래서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금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먼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의인을 부르러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완전함을 요구하고 기대합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머리가 깨져 피가 쏱아지고,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꼴을 하고 병원에 왔냐(옷갈아입고, 피좀 닦고 오지!)’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오고, 신자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우리가 완전해서가 아닙니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신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실수와 잘못이 많기에 교회에 나오는 것 아닙니까? 더욱 그래야만 합니다. 어느 교회에 안수집사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술을 못끊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 냄새를 풍기면서 주일예배에 꼬박 꼬박 나오더랍니다. 그래서 주변에 사람들이 어떻게 안수집사 술 냄새를 풍기면서 예배에 나오냐고 비난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이 안수집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나와야지요!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고 말하고, 19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는 다는 말과 그리스도안에서 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일도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이후에도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필요한 존재라는 말은 결국, 모든 사람이 자비와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누구라도 자비와 사랑으로만 대해야 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전13장은 사랑장입니다. 사랑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심지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까지 말을 합니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서 가장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맞습니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이 우리가 가진 믿음의 증명을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말입니다. 또, 요13: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이웃사랑을 지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 모든 신자들에게 늘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자세한 부분은 주일에 다시한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둘째는,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사랑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다 연약하고, 부족하고, 흠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지만, 완전품이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완전품이 무엇입니까? 완전하게 만들어진 제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으면 불량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완제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라고 만들어지고 완성되어야 하는 존재로 태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고, 실수 할 수밖에 없고, 늘 흠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을 고전13:9절 이하에서 보면, 9절을 보면,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1절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12절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표현들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과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들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에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즉,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이 영원토록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서로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완전하지 않음이 당연한 것이고, 그러기에 어느 순간에든 사랑과 자비로 대우해야 하는 것입니다.
3.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자라도 완전할 수 없다는 점과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묵상할 것은,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과연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바로 ‘오래 참음’ 이라는 방식으로 사랑해주어야 합니다. 고전13:4-7절까지를 보면, 바울은 사랑을 15가지 정도로 말을 합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하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으며,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느니라’고 말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사랑을 말할 때, 오래참음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을 참고 믿고 바라며 견디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바울이 말하는 15가지의 사랑의 정의들 모두가 오래참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서 오래참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실수하고 부족하다고, 수준 이하라고 해서, 교만히 굴거나, 무례히 행하거나, 성내지 말아야 합니다. 참아주고, 견뎌주고,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의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서로를 참아주고, 견뎌주고, 기다려 주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완성의 자리로 이끌어가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자녀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자녀가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을 생각해보십시오! 스스로 우유를 삼키기 까지 얼마나 토를 많이 했습니까? 스스로 밥을 먹기까지 얼마나 많이 밥을 흘리고 쏱았습니까? 용변을 가리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똥과 오줌을 쌌습니까? 걷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넘어졌습니까? 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옹알 거리고, 틀린 말을 했습니까?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 얼마나 아펐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중에서 그런 모습의 아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하거나, 욕하고 정죄한적 있습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실수가 반복되어야 잘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성되어 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오래참음으로 키워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모든 사람을 자라가게 하실 것이고, 완성시켜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때까지 참아주고, 견뎌주고, 기다려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우자를 참아주십시오! 부모 자식을 참아 주십시오! 성도를 참아 주십시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우리는 영적인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본문과 삶
1)그러므로 누구도 완전 할 수 없습니다.
2)그러므로 우리들이 서로를 바라볼 때, 완전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3)특별히 오래 참아주고, 견뎌주고, 기다려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더 이상 제발 누구에게도 왜 그래? 그것밖에 못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는 비난의 말이나 생각을 중단하시고, 하나님께서 오래참고 자라게 하시고 완성시키실 것을 믿고, 그 사람 곁에서 참아주고, 견뎌주고, 기다려주고, 웃어주고, 위로하고, 이끌어주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 주신 간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