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후4:7-18절 고린도후서강해19
제목 : 낙심을 이겨냅시다!
성도들의 삶속으로
여러분은 학교에 다닐때에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또, 반대로 여러분이 가장 싫어하는 과목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음악과 수학이 가장 싫었습니다. 그런데 종 종 수학은 뭐하러 배울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12년간이나 배운 수학은 구구단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 거의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들면, 혹시 여러분 중 살면서 혹시 미분 적분, 집합, 방정식, 코사인, 탄젠트, 삼각함수.., 등을 사용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수학 관련 계통에서 일하는 분이 아니고는 거의 사용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구구단도 사용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더 많습니다. 물론,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악, 미술, 체육, 도덕, 사회..., 등 우리가 안 배운다고 해서 못사는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을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이유가 있겠지만, 의료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두뇌발달을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다양한 과목을 배움으로 인해서 두뇌개발에 큰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다양한 과목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과목은 학교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우리 신앙생활속에서도 다양한 신앙의 과목이 있습니다. 예를들면, 말씀, 기도, 순종, 예배, 찬양, 섬김, 그리고 우리들이 좋아하지 않는 과목인 절망, 실패, 낙심이라는 과목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신앙의 과목이든, 좋아하지 않는 신앙의 과목이든지 간에 우리의 신앙에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1) 연결 – 오늘 본문 역시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낙심이라는 과목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낙심의 유익에 대해서 배우고, 낙심을 이겨내는 비결 또한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낙심된 일을 만난 바울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바울은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격은 낙심의 문제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미 우리들이 살펴본, 8-9절을 보면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했고, 답답한 일을 당했고, 박해를 받았고, 죽음의 자리에 넘겨지고...,등’입니다. 여기서 욱여쌈을 당했다는 말은, 마치 과일의 즙을 짜기 위해 짖누르는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즉, 바울은 여러 가지 일로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리적인 압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유대인들의 감시와 협박, 유대인들의 공격..., 등으로 마음의 압박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매월마다 찾아오는 세금일, 직장에서 정해진 시간안에 해결해야 할 업무, 그 외에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될 많은 일.., 등과 같을 것입니다. 또, 답답한 일을 당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자신의 바램대로 되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되어지지 않고, 하는 일들마다 잘 풀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아픔과 고민스러운 마음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자신의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큼의 박해의 순간을 격었습니다.
특별히 바울이 당한 낙심스러운 일들을 고후11장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23-29절을 보면, ‘여러번 감옥에 갇히고, 매를 수없이 맞고, 여러번 돌아 맞아 죽을번 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5번이나 맞고, 3번 태장으로 맞고, 3번 파선이라는 위험한 순간을 당하고,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 가짓 형제 중의 위험, 수고하며, 애쓰며 여러분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순간을 많이 겪은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낙심의 일들이 결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함도 아니고, 자신의 명성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이 땅에서 호화호식하기 위함도 아니고,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함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자신의 야망, 명성, 호화호식, 부와 권력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덜 억울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아닌, 오직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이러한 낙심의 일들을 격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낙심스러운 순간을 살았던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이 알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2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믿음을 가져도 낙심의 일에는 예외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얼마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믿음이 좋았던 바울에게도 낙심의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도 낙심의 일들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 종 성도들 가운데에는 낙심된 일이 생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생긴 것으로 여기고 당황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아도, 기도를 열심히 해도, 예배생활을 잘 해도, 충성된 사람이어도 낙심의 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는, 낙심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의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낙심의 일을 겪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형통과 축복도 필요하지만 낙심된 일도 분명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신앙에 정결함과 큰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에 따듯한 햇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비 바람도 필요하고, 태풍도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낙심된 일이 우리의 신앙에 정말 크고 복된 것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를 더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 세워가기 위해서 낙심이라는 과목을 겪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소개된 믿음의 인물들을 보면, 모두가 낙심이라는 과목을 통과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일 때문에 낙심하고 계십니까?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상일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더나가서 여러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 겪게 하시는 순간임을 기억하시고, 낙심의 순간을 잘 감당하고 이겨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환난의 경한 것
다시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참 놀라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즉,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낙심할 만한 순간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전혀 낙심하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17절을 보면, ‘우리가 잠시 받는 화난의 경한 것’ 이라고 까지 말을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겪은 낙심의 일들은 ‘경한 것’ 쉽게 말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식대로 말하면, ‘그 쯤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이러한 고백을 들으면서 여러분은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혹시, 사도니까 성도들에게 아닌척 하는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결코 그런 위선자가 아닙니다. 롬7장을 보십시오! 바울은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 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또, 딤전1:13절에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라고 고백을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자신의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결코 사도이기 때문에 그런척 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혹시, 바울이 겪은 일이 바울의 말대로 별것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미 살펴본대로 바울은 우리가 겪는 그 어떤 일보다도 더 낙심된 일들을 겪은 사람입니다. 우리 식대로 말하면, 우리 보다도 더 깊은 한숨을 쉴 일만 순간을 겪었고, 우리보다 숨도 쉬지 못한 말한 일을 겪었고, 우리 보다 더 아픈 상처를 겪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 보다도 더 많은 실패를 겪은 사람입니다. 그래도 실감이 안 믿겨지십니까? 그러면 여러분이 겪고 있는 낙심스러운 일과 바울이 겪었던 낙심스러운 일을 바꾸어 볼 용기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없을 것입니다. 혹시, 사도 바울은 아픔을 잘 참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특별히 아픔을 잘 참는 사람은 없습니다. 각 각 다르게 아픔을 표출할 뿐입니다. 그리고 고후12:7-8절을 보면,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육신의 병을(안질, 간질) 위해 3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고 말을 합니다. 만일 그가 아픔을 잘 참는 사람이라며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우리들이 느끼는 인생의 무게와 고통을 같이 느끼는 평범한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우리와 남다르게 살아간 사람을 보면,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고 핑계하려는 잘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당한 낙심된 일들을 ‘경한 것’ ‘그까지것 쯤~’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어떤 낙심된 일 속에서도 바울과 같이 그 까지것 쯤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이 인생을 살면서 겪게 되는 낙심스러운 일, 아픔을 아무것도 아닌, 엄살부리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분명히 여러분은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힘내십시오! 그러나 힘내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사도 바울과 같이 그런 낙심된 일들을 그 까지것 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지혜를 갖기를 바랍니다.
3.무엇이 차이인가?
그렇다면, 바울은 낙심된 일들을 그까지것 쯤~ 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들은 죽을 지경이고,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낙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무슨 차이일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들도 사도 바울과 같이 어떤 낙심의 문제도 경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요? 2가지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삶 또는 신앙의 목표(가치)가 올 바라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잘 먹고 잘 사는 것, 성공하는 것, 부자가 되는 것, 형통하는 것, 높아지는 것..., 그렇다면, 바울의 삶의 목표는 무엇이었을까요? 조금 전에 말씀 드린 것들일까요? 전혀 아닙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의 기뻐하심, 하나님의 칭찬(상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빌3:14절을 보면,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기쁨이며, 하나님의 상주심입니다. 그러기에 그가 하나님의 기쁨과 상주심을 위해 겪는 낙심된 일들은 그 까지것 쯤 되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행5장을 보면, 사도들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에 의해서 끌려가 감옥에 갇히고, 채찍에 받은뒤 풀려납니다. 그때 사도들의 모습을 행5:41절을 보면,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여러분 상상해보십시오! 사도들은 채찍에 많아 온 몸이 피투성이었을 것입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쁨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낙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기뻤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삶의 목적, 그들의 인생의 가치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 분을 위해 살고, 그분의 칭찬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집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낙심을 이기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을 소원하며 살지 말고, 세상의 것들을 목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대로 말한다면, 보이는 것, 영원하지 않는 것에 가치를 두고 살면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쁨, 상주심, 영원한 것에 가치를 두고, 목표하며 살 때, 바울과 같이 낙심을 이길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낙심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낙심이 여러분에게 빼앗을수 있는 것은 오직 질그릇 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상상 할수도 없는 박해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겪은 어떤 낙심도 바울 자신안에 있는 보배를 빼앗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낙심된 일을 겪는다 할지라도 그게 불치병이고, 그게 죽음이라 할지라도 여러분 안에 있는 보배는 결코 빼앗지 못할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롬8:35-39절을 함께 봅시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겪는 그 어떤 낙심된 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 놓을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낙심된 일속에서도 낙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낙심도 우리 신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하는 신앙의 과목입니다.
본문과 삶
1)왜냐하면, 낙심을 통해 우리들의 신앙에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2)그러므로 낙심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3)즉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속한 것들을 목표하고 소원하는 삶, 그리고 낙심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낙심거리를 만났을 때마다, 그 낙심거리가 무엇이라 해도, 그것이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빼앗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기억함으로 바울처럼 ‘그 까지것 쯤’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