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전10:23-11:1절
제목 : 이웃 사랑의 목표!(고린도전서강해38)
성도들의 삶속으로
기독교 야사(野史)에 보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간 동방박사가 3명이 아니라 4명이라고 합니다. 3명의 박사는 황금, 유향, 몰약을 가지고 갔고, 또 다른 한사람은 의약품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께 가는 길에 병들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었고, 이 4번째 동방박사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자신이 준비한 의약품으로 정성껏 간호를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 병자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아기 예수님께 드릴 의약품과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써버려 갈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환자 옆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이 사람을 두고 갈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더 이상 갈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땅에 오심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경배합니다’ 그가 기도를 마쳤을 때 놀랍게도 그의 곁에서 환자가 주님의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야사입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주님을 사랑하는 일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25:40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1) 연결 - 오늘 역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웃 사랑을 소원하며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될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본문의 근본적 교훈 말하기
1.이웃 사랑이라는 신앙의 목표!
우리는 지난 시간 고린도교회 신자들이 신앙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에게는 신앙의 분명한 목표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일을 하던지, 특별히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목표를 가져야 더 잘 할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신앙의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였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사는 신앙의 목표를 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지난 한주간 하나님의 영광을 신앙의 목표로 품고 사셨습니까? 아멘이시지요? 앞으로 계속해서 자신의 영광 곧 나의 기쁨과 만족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신앙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계속해서 묵상할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또 한가지 신앙의 목표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로 ‘이웃 사랑’ 이라는 신앙의 목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웃 사랑은 성경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시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목표입니다. 예를들면, 십계명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10개의 계명 중에서 무려 6개의 계명이(부모를 공경, 살인말라, 간은말라, 도적질말라, 거짓증거 말라, 탐내지 말라) 이웃 사랑을 위한 계명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22장을 보면, 어느 율법사에 예수님께 율법 중에서 어떤 계명이 크냐고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 이 질문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목표, 지향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을 보면, 이웃에 대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규례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웃 사랑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목표인 것입니다. 특별히 요일4:20절의 말씀을 보면 이 점을 더욱 명확히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수 없느니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니다. 즉, 이웃 사랑은 결국, 하나님 사랑의 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역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중요한 신앙의 목표라고 말을 합니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과연 사랑이 무엇일까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좋은 감정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래서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말씀이 무엇인가요? 마5:44절의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일까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의무와 책임을 다해주는 것, 간단히 말하면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들면, 배고픈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사랑이고, 목마른 자에게 마실 물을 주는 것이 사랑이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즉,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아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강도에 만나 쓰러져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때 레위인과 제사장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들은 강도만나 쓰러진 자의 상처에 포도주를 붓고 자신의 나귀에 태우고 주막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습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좋은 감정, 남다른 감정이 있었을까요? 아마 불쌍히 여기는 감정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은 유대인이었을 것이고, 그를 돌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이게 때문입니다. 여러분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쌍히 여기는 감정만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냥 지나친 레위인이나 제사장에게는 불쌍히 여기는 감정조차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에게도 틀림없이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감정을 가졌다고 해서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상대방에게 유익을 준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닌 유익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8:1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덕을 세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24절 ‘누구든지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 말을 합니다. 또, 33절에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고 말을 합니다. 이게 사랑인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에 실패한 이유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자 하는 신앙의 분명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왜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할까요? 우리들이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할까요? 그것은 복에 대한 목표, 응답에 대한 목표는 있지만, 이웃사랑이라는 신앙의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앙의 목표와 더불어 이웃 사랑이라는 신앙의 목표를 품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이웃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우리의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2가지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 모두는 자유자입니다. 즉, 죄와 죄의 결과에서 자유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는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문제가 아닌 이상 우리 모두는 자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를들면, 어떤 옷을 입든지 자유입니다. 또, 어떤 머리 스타일을 하던지 자유입니다. 어떤 음식을 먹던지 자유입니다. 어떤 집에 살던지 자유입니다. 어떤 차를 차던지 자유입니다. 십일조를 제외하고 얼마를 헌금 할지도 자유입니다. 죄된 말이 아닌 이상 어떤 말을 하던지 자유입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니고, 죄가 아니라면 우리는 모든 일에 자유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23절에 ‘모든 것이 가하나’ 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유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내 자신의 자유를 고집한다면 우리들은 결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수 없는 것입니다. 도리어 내 자유를 포기할 때, 비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자유를 포기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자유를 보며 누군가가 오해를 한다면 그때 여러분의 자유를 포기하십시오! 예를들면, 바울은 지금까지 우상의 고기를 먹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해왔습니다.(고전8:13, 10:21절)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우상의 고기에 대한 태도를 좀 달리 말합니다. 즉, 25절을 보면,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묻지 말고 먹으라’ 27절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바울은 먹으라, 먹지 말라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른 사람의 오해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이 우상의 고기를 먹지 말라고 말한 것은, 우상의 제단에서 먹지 말라고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제단에서 우상의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우상을 인정한다는 행위로 오해 받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장에 파는 고기, 누가 차려준 음식의 고기는 단지 음식의 한 재료로 알기 때문인 것입니다. 즉, 누군가가 오해하게 된다면 그 때에는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예수님의 모습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17장을 보면,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계실 때에 성전세금을 받는 사람이 베드로에게 ‘너희 선생은 왜 반세겔을 내지 아니느냐’ 라고 묻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을 전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기 때문에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 말을 합니다. 성전 세금에서 자유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내라’ 고 말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이 오해하지 않도록 자유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역시 자유 가운데 행할 때(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오해하지는 않을가?(생각보다 그런 일들이 많을 것이다.)를 늘 고민하고, 만일 누군가가 오해할 만하다면 그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옳고 그름이라는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이 점을 다시한번 우상의 고기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우상의 고기를 먹는 일은 죄일까요? 죄가 아닐까요? 죄가 아닙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 말고 다른 신(우상)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신(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일은 전혀 죄가 되지 않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의 고기를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우상의 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를 비난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정죄하기 까지 했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웃 사랑,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고린도교회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수준에서 행동 할 때가 참 많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옳고 그름이라는 지식의 수준을 따라 행동하면 안됩니다. 예를들면, 바른 말, 옳은 말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누군가에게 바른 말을 하는 것을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옳은 말, 바른 말을 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를들면, 왜 십일조 안하냐? 왜 성경 안보냐? 왜 기도 안하냐? 왜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냐? 다 맞고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옳고 바른 말이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6절을 보면,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고 옳고 바른 말을 하는 일에도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웃을 사랑하는 목표를 가지고 살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오해한다면 자유를 포기하십시오! 옳고 그름이라는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3.그리스도를 본받는자가 되라!
우리는 지난 주, 이번주를 통해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품어야 할 신앙의 목표 2가지를 묵상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영광돌림 이라는 목표이며, 둘째는, 이웃 사랑이라는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이 2가지 신앙의 목표를 한마디로 줄일 수 있습니다. 바로 고전11:1절에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신 분이시며, 그리스도야 말로 이웃 사랑을 가장 완벽하게 실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목표로 한 평생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참 신앙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의 위대함은 신앙의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바로 이러한 열정으로 인해서 바울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하는 신앙의 목표를 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순간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라는 고민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교리적용
신앙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본문과 삶
1)특별히 오늘 우리들은 이웃사랑이라는 신앙의 목표를 묵상했습니다.
2)그리고 우리들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해가 생기는 일에는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3)그리고 옳고 그름이라는 지식의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망(성장)으로의 인도
저는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예수님의 삶을 재현하고자 하는 신앙의 목표를 품게 됨으로, 날마다 신앙의 승리자가 되기를 바랍니다.